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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의 그리스로마신화 ㅣ 현대지성 클래식 13
이디스 해밀턴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4월
평점 :
의인화된 세상, 전능한 미지의 대상을 향해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들, 이것이 그리스 신화의 기적이다. 그리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무시무시한 불가해성과, 땅과 공기와 바다를 가득 메운 초자연적 존재의 무서움이 그리스에서는 모두 거부되었다. 신화를 창조해낸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것을 싫어하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일부 이야기가 아무리 환상적이라고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심지어 매우 황당한 것조차 본질적으로는 합리적이며 실제 세계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9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해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신화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인의 상상 세계가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수천 년이 지난 현대에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철학자와 역사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미술과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과학기술 분야의 용어가 될 정도로 서양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 역사학, 인류학, 심리학 등 인문학 전반을 포괄하는 인류 문화의 원형이라는 점 때문에 이를 다루고 있는 책들도 정말 너무 많다.
어릴 때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버전들 외에 성인이 되어서 제대로 읽은 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 쓴 버전이라 누구나 친근하게, 쉽고, 재미있게 신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버전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저자가 직접 신화의 무대였던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 곳곳의 유적지와 박물관을 누비며 찍어온 사진들도 많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윤기 버전으로 읽었던 것도 꽤 오래 전이고 해서 이번에는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이자 스토리텔러인 이디스 해밀턴 버전으로 만나보고 싶었다.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나오는 것도 믿음직하고, 초판 발행 80주년 기념으로 컬러 도판 100장이 포함된 전면 개정판이라고는 것도 기대감을 더해 주었다.
마침내 오디세우스 일행이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키르케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지식을 총동원했다. 키르케는 그들이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기 위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런데 키르케가 알려준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그들은 오케아노스 강을 건너 하데스의 어두운 왕국으로 가는 출구가 있는 페르세포네 해안에 배를 대야 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오디세우스는 저승으로 내려가 테바이의 거룩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을 찾아야 했다. p.389
이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 원전은 충실하게 연구해 가장 원전을 잘 살린 버전이 아닌가 싶다. 초기 신화 작가들과 마지막 작가들 사이에 약 1,2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하기에 이 모든 신화를 한 권으로 묶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신화들을 어떻게 엄선하고, 원전을 잘 살리느냐가 관건이다. 이디스 해밀턴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자신만의 관점에서 신화를 재해석하면서도, 원전을 생생하게 되살려 우리를 당시의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 기꺼이 데려간다. 고대 원전을 비교 분석한 뒤 각 이야기의 서두에 어떤 작가의 작품을 참고했는지와 그 특징과 관전 포인트는 뭔지 설명해두어 객관적으로 신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두기도 했다.
특히나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수십 명의 예술가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창작한 회화 및 조각 작품 총 100편을 정선해 수록해서 더욱 소장가치가 있다. 사진들이 모두 컬러로 퀄리티가 높은 편이고, 텍스트만으로 보여지지 않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사진이 보충해주어 더 재미있고 몰입감있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기독교의 <성경>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두 기둥을 형성해왔다. 오늘날에도 만화와 공연, 전시, 소설 등으로 끊임없이 모티브를 줘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고 있으니 여전히 그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떤 버전으로 읽어도 가독성이 뛰어나고 흥미진진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검색하면, 무려 구백 권이 넘는 책들이 나온다는 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이디스 해밀턴의 버전으로 가장 원전에 가까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나 보자. 특히나 현대 지성 클래식 버전에는 주요 신들과 가문들의 계보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들을 그리스식, 로마식, 영어식으로 비교해 정리한 도표를 수록해 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컬러 도판이 많은데다 글도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될 테니, 아직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