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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을 건너온 너에게 - 여백을 담는 일상의 빛깔
방수진 지음 / 이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절판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그림에 담는다. 처음에는 뒤엉킨 마음처럼 연필 선도 뒤죽박죽이다. 그려진 그림을 좀더 단순한 선으로 정리한다. 단순해진 밑그림에 내 마음이 담긴 사물을 넣는다. 마음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색과 기법을 찾고,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그림의 명암으로 표현한다. 그린 후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글로 다시 담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보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과 만난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p.77
수채화는 물감을 물에 풀어 종이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수채화는 특유의 물맛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투명함과 자연스러운 번짐이 주는 매력 때문에 기름에 개어 그리는 유화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투명하게 번지는 기법과 극사실적인 표현, 재질감에 따라 재질미를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표지 역시 금방이라도 만지면 푸른 빛이 손에 물들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입시 준비는 연필과 아크릴 물감으로 했고, 수채화는 중학교 때까지 그린 것이 다였다고 한다. 유화, 아크릴, 과슈, 색연필, 오일파스텔 등 여러 재료를 거쳐 오면서 맑고 투명한 수채화가 자신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수채화의 묘사와 여백이 생각을 쌓고 비우는 과정과도 같았던 것이다. 수채화에서는 무엇보다 원하는 농도를 찾기까지 상당한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은 그 농도를 사계절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특히나 계절에 예민한 사람이 수채화를 그리면서 느끼는 삶의 농도는 어떤 걸까.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내가 우아한 작업실에 앉아 매일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그릴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적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밤늦게 일어나 작업하고 영감이 떠오르면 붓을 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아니다. 아이 셋의 엄마이기에 시간을 쪼개 사용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그리고 싶을 때 붓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작업하고 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내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삶의 태도, '성실함' 때문이다. p.184
방수진 작가의 그림은 SNS를 통해서 종종 만나왔기에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사실 완성된 수채화의 그림 풍경들 뒤의 모습은 알지 못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시간을 쪼개어 겨우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15년 경력 단절 아줌마에서 지금은 외주 작업으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하고, 강의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쫓기듯 바쁜 생활 속에 만들어낸 작품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그림들이었는데, 그 속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구나 싶었다. 보여지는 것 이면의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근사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림과 인생 모두 명도가 중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명도는 색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로, 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를 뜻한다. 명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림의 대비가 강해지고, 이미지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운과 행운의 격차가 클수록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그림 안의 다양한 명도처럼, 인생 안에도 희로애락이라는 명암이 존재하게 마련이고, 그 좋은 날들과 힘든 날들이 모두 나라는 한 존재를 만들어 간다.
이 책에는 수채화를 그리는 과정과 그림에 대한 여러 이야기부터,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삶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름다운 수채화 그림들만 보아도 눈이 호강할 수 있는 책이지만, 그 그림들 뒤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자. 매일 주어진 것에 집중하는 성실함과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한결같음이 빚어내는 일상의 빛깔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작가의 말대로 삶은 수채화와 닮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어디에 집중하고 여백을 두느냐에 따라 내 삶의 농도도 달라질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