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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소 ㅣ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평점 :
책을 내려놓고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자줏빛에서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 자신이 연약하고 무장해제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비웃었다. 내 뺨에 누군가 기대어오면 나는 그를 붙잡아둘 것이다. 나는 그를 내 몸에 대고 사랑의 비통한 격렬함으로 꽉 껴안을 것이다. 나는 베르트랑을 탐낼 만큼 충분히 파렴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행복한 모든 사랑을, 열광적인 모든 만남을, 모든 노예 상태를 탐낼 만큼은 충분히 슬펐다. p.47
스무 살 도미니크는 남자 친구인 베르트랑과 그의 외삼촌인 여행가 뤽을 만나러 간다. 그의 외삼촌을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첫 애인인 베르트랑의 권유에 그냥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베르트랑은 자신의 외삼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보였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도미니크는 그가 전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조금 늙었지만 내 마음에 들어. 이 남자는 나 같은 부류의 어린 여자애들에겐 유혹적이야'라고 생각한다. 사실 뤽은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지만, 다른 여자들과 연애를 하며 그걸 심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40대의 남자였다. 순진한 도미니크 역시 어느 순간부터 그와 가까워져 사랑에 빠져들고 만다.
도미니크는 베르트랑에 대한 애정을 품은 채로 주저 없이 뤽을 생각하곤 했다. 뤽의 매력은 일상의 지루함을 뛰어 넘는 유혹적인 것이었고, 도미니크는 베르트랑과는 지난 일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젊은 여자의 바보 같고 사소한 갈등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유부남과의 사랑과 이별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순수한 도미니크의 마음에 비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남자의 사랑은 시종일관 냉소적이다. 젊은 여성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과 사랑을 겪고, 그것이 끝난 뒤 성숙해 가는 과정이 사강 특유의 세련된 문장으로 담백하게 그려지고 있다.
나에게 힘을 주는 것, 그것은 내 지성이었다. 그럴 정도로 나는 이 열정에 대항하고, 그것을 조롱하고, 나 자신을 야유하고, 나 자신과 힘든 대화들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지성은 그렇게 조금씩 내 친구가 되어갔다... "어떻게 하면 이 출혈을 멈출 수 있을까?" 슬픔으로 엉겨붙은 밤들은 한결같고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독서에 열중하다 보면 낮들은 때때로 빠르게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숙고하는 것처럼 '나와 뤽'에 대해 숙고했다. 그러나 그 숙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아래로 툭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보도 위에 멈춰 서는 순간을 막지는 못했다. p.187
이 작품은 사강이 <슬픔이여 안녕> 이후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다.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발표한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1958년 장 네귈레스코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파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로맨스 영화였는데, 영화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던 작품이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애원하는 도미니크와 그녀의 곁을 떠나며 이 일은 지나갈 거야,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말하는 뤽의 온도 차이는 명백하다. 도미니크 역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이별로 인해 얼굴을 찌푸릴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것이 끝났을 뿐 단순한 이야기였다. 혼자가 되었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도미니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 짖는다.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이고, 다시 이별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무슨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강의 두 번째 소설을 통해 사랑이 끝난 후에 짓게 되는 미소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