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밤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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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기억은 몹시 뒤죽박죽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부른 구급차. 이명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기묘한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구급대원들의 모습... 피투성이로 땅에 널브러진 에쓰코. 춤이라도 추듯 기묘한 방향으로 내뻗은 팔다리. 경차에서 내린 나이 든 여자는 망가진 기계처럼 온몸을 떨었다. 산산이 부서진 경차의 앞 유리창. 그 앞 유리창을 깬 물체는 박살 나서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갈색 흙. 자홍색 꽃. 흰색 도자기 조각. 그 조각 중 하나에 ‘엉겅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한 사이에 구급차는 달려갔다.       p.13~14

 

유키히토는 15년 전 아내가 죽은 뒤 딸 유미를 홀로 키워왔다. 그날 아내는 유미의 어린이집 등하원용 가방을 만들 천을 사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갑작스레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이 떨어졌고, 지나가던 경차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차가 아내를 친 것이다. 그리고 그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려다 떨어뜨린 것은 바로 네 살 딸 유미였다. 사고 이후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사고의 진상을 숨겨 왔다.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고, 사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덮어버렸다. 그런데 15년 뒤,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비밀을 알고 있다고, 사고를 친 건 당신 딸이라고, 돈을 요구하는 그는 딸에게 전부 말하겠다고 그를 협박한다.

 

협박전화를 받은 뒤 불안에 떨던 유키히토는 대학교 기말 사진을 찍으러 하타가미에 가보고 싶었다는 유미의 말에 30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으로 향한다. 협박자로부터 딸을 떼어놓고 싶었고, 오래 전부터 마음에 남아 있었던 과거의 의문을 낱낱이 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고향은 어머니가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자신과 누나가 벼락을 맞았고, 독버섯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이 죽었으며, 아버지가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 조사를 받았던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누나는 번개를 맞은 뒤 몸에 무참한 흉터가 새겨진 상태로 살아왔고, 유키히토는 당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으며, 사건과 관련된 사실들을 외면하며 살았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다시 돌아간 고향에서, 어쩌면 죽은 아버지가 정말로 살인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살의는 분명, 언제나 수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그저 운이 좋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야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하타가미의 하늘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저 새의 그림자만이 울음소리도 없이 시야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벼락처럼, 끌어들이는 요소와 응하는 요소가 우연히 맞닥뜨려서 살인이 일어나는 거겠죠. 약간의 불운이 살의를 살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 불운의 시초는 뭐였을까.         p.419

 

유키히토는 딸과 누나와 함께 찾아간 고향에서 자신이 외면하고 살아왔던 일들에 대해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석 달 전까지 살아 있었던 아버지가 종잡을 수 없이 모호한 존재로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행복한 추억을 수없이 쌓아 왔고, 자신에게 요리와 장사를 가르쳐주었던 아버지였는데..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난 30년간, 아버지가 독버섯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 왔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가슴속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그 믿음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딸에게 비밀을 밝히겠다며 협박했던 남자가 고향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유키히토는 딸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기로 한다.

 

진실을 끝까지 숨기는 건 얼마나 큰 죄일까. 몰라도 되는 일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기억에서 지워진 행동을 영원히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죄일까.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숨기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유키히토는 수십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가 중얼거렸던 '난 틀리지 않았어'라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족을 지켰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그른 행동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딸에 이르는 3대에 얽힌 비극은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각자 그 진실을 모른 채로 시간이 흘렀다. 이 작품은 '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에 대한 흥미로운 미스터리인 동시에, 수십 년간 이어져온 슬픈 가족사를 그려내고 있는 먹먹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이번 미치오 슈스케의 신작도 놓치지 말자. 특히나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앞으로 내가 쓰는 작품들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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