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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평점 :
나는 먼저 목욕을 하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려다가 무심코 유키코와 나오코를 돌아봤는데 그 순간 문득 휴일 저녁의 평화로운 광경에서 거짓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함께 노는 동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조금 거리를 두고 돌아본 내 시선은 그 방에 넘치는 행복이 그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 행복이 오로지 나의 인내로만 버텨가고 있다는 것을, 나의 인내가 절벽을 떠도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나는 문을 반쯤 연 채 갑작스러운 증오를 무거운 짐처럼 가슴에 안고 우두커니 서버렸습니다. p.118~119
평범한 가정집 정원의 나무 아래에서 네 살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소녀의 엄마는 문화센터에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 언니에게 딸을 잠깐 맡겼고, 소녀의 이모는 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다녀오느라 잠깐 시아버지와 소녀를 집 안에 남겨두고 외출한 상태였다. 치매 증세가 있는 시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요구하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다음 날 집에 젊은 남자가 드나드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난다. 하지만 범인을 찾아 내는 일은 경찰에게도, 그리고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도 결코 쉽지가 않다. 아이를 언니네 집에 맡겨놓고 젊은 남자와 호텔에 있었던 엄마, 아내의 불륜 사실을 폭로하려던 아빠를 비롯해서 이모와 이모부 등 각자가 감추어오던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들 각자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되는데, 한 명씩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진실을 고백할 때마다 범인이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대체 범인이 누구라는 건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거듭되는 반전을 거쳐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 간다. 주위에서는 사이 좋은 자매인 줄 알았지만, 사실 매사에 마음이 맞지 않아 날마다 은근한 다툼이 많았던 언니와 동생, 치매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지만, 사실 그런 일상이 지긋지긋했던 여자, 거리낌없이 불륜을 저지르며 남편과 가족들을 배신하는 여자,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을 고백하는 아내, 수십 년 전 전쟁 때 남태평양에서 저지른 살인의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등...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가면을 샅샅이 들춰내는 이야기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겉으로는 별다른 평지풍파가 없더라도 누구나 내면에는 욕망과 질투, 배신과 복수심, 심지어 살의를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자꾸 꽃 넝쿨로 목을 매려다가 나동그라져 죽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올리는 노인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나오코의 죽음까지 그리 슬픈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노인의 괴상한 말과 행동을 혼자 감당하면서 사토코는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껴왔지만 왠지 이 순간, 사토코는 처음으로 이 노인네는 미친 게 아니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 나를 포함해 죽음을 잔혹하고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친 것이다.... 그렇게 느껴질 만큼 그때 정원 안에는 낙원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온화한 것이 있었다. p.186
이 작품은 국내에 2011년에 출간되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개정판이 나왔다. 이사카 고타로는 이 작품에 대해 “충격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렌조 미키히코표 미스터리의 걸작”이라고 했고, 다나카 요시키는 “이런 작가가 있는데 어떻게 미스터리를 쓸 수 있겠는가!”라는 평을 했을 정도로 작가들로부터 경탄을 받았다. 이 작품은 치밀한 서술트릭과 거듭되는 반전도 뛰어 나지만, 무엇보다 섬세한 심리 묘사와 대담한 설정에서부터 압도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작가의 의도대로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휘둘리는 자신의 마음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고, 장르적인 재미도 가득한 작품이니 말이다. 과연 이들 중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소녀를 죽인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이야기는 완전히 마지막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감을 틀어 쥐고 놓지 않는다.
소설 백광은 반전이 백미인 추리소설인 만큼 출판사에서 "범인의 정체에 놀라지 않았다면 전액 환불해드립니다" 환불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만큼 작품에 자신있다는 말일 것이다. 자세한 이벤트 내용은 스튜디오 오드리 공식 계정 (@studioodr)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강렬한 색감의 표지 이미지만큼이나 독자들을 홀리게 만드는 마성의 추리 소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