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신의 오후 (앙리 마티스 에디션)
스테판 말라르메 지음, 앙리 마티스 그림, 최윤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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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러나, 이 세상이 주인인 것을, 때때로/떨쳐지지 않는 생각이 이 안전한 피난처까지 찾아오니 진저리가 나고,/어리석음의 역겨운 구토에/창공 앞에서 코를 막을 수밖에 없구ㅏ.
이 쓰라림을 아는 나여,/괴물의 모욕을 받은 수정을 깨고/깃털 없는 나의 양 날개로 달아날 방법이 있는가?/ - 영원히 추락하는 한이 있어도.      p.33, '창' 중에서

 

이 책은 앙리 마티스가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를 직접 선별해 편집하고, 삽화를 그린 시집이다. 이 시집을 위해 마티스는 200장의 드로잉을 흑연으로 그렸고, 그중에서 60점을 에칭화로 제작했다. 책에 수록된 것은 그 중에서 29점으로 말라르메의 시 64편과 근사하게 어우러져 특별한 아트북이 되었다. 이 에칭화들은 시집을 장식하거나 시를 보조하는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완성된 시집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예비작업을 거쳐 제작된 작품들이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마티스의 작업과정과 그림들에 대한 자세한 배경설명이 되어 있어 시와 그림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라르메 연구자 중앙대 최윤경 교수가 번역을 맡아 음악성과 문학적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우리말로 옮겼는데,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말라르메의 시를 한층 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순결하고, 강인하며 아름다운 오늘은/취한 날갯짓 한 번으로 깨뜨릴 것인가/달아나지 못한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서리 아래 사로잡고 있는 이 단단한 망각의 호수를!
지난날의 백조는 회상한다 화려하였으나/메마른 겨울의 권태가 빛났던 때/살아야 할 곳을 노래하지 않은 탓에/희망 없이 놓여나게 된 제 모습을.    p.144, '순결하고, 강인하며 아름다운 오늘은' 중에서

 

사실 <목신의 오후>라는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시가 아니라 발레 공연이었다. 말라르메의 시를 바탕으로 니진스키가 안무를 창작해 <목신의 오후>라는 발레를 무대에 올렸는데, 사실 말라르메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대에 올리기 위한 드라마로 쓰였다고 한다. 정작 상연은 거절되었고, 이후에 드뷔시가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발표한 뒤,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에 의해 무대 공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목신은 머리와 몸은 사람이고 허리 아래는 짐승처럼 생긴 반인반수이다. 잠에서 깨어난 목신이 님프들과 만났던 일을 떠올리고, 요정들이 숲속에 등장하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관능적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작 말라르메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났다.

 

신화 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종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말라르메의 시들은 어렵더라도, 표제작이기도 한 마티스의 그림 덕분에 관능적인 몽상과 인간의 욕망과 허무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야말로 그림과 시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특별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나처럼 <목신의 오후>를 니진스키의 발레 공연으로 먼저 접했든, 혹은 드뷔시의 음악으로 알고 있었든 간에, 이번 앙리 마티스 에디션은 꼭 만나 보기를 추천해주고 싶다. 말라르메의 시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주는' 버전은 없을 테니 말이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와 20세기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 두 거장의 특별한 만남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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