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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방 - 성을 넘어 자기가 되는 삶 ㅣ 이다의 이유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지소강 옮김 / 이다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아주 약할지라도 소설은 삶의 네 모서리를 붙인 거미줄과 같습니다. 소설이 삶에 붙어 있다는 사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온전히 자기 힘으로 그곳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미줄이 모서리에 걸려 비스듬히 당겨지고 가운데가 찢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거미줄이 실체가 없는 존재의 힘으로 허공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생스러운 노동과 건강과 돈과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p.90
우리 시대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명저를 선정해 출간되는 '이다의 이유'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방>과 <에밀 졸라의 진실>이 출간되었고, <나혜석의 고백>과 <정조의 공부>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출간된 것은 1929년이다. 그로부터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성들의 삶은 과연 자유로워졌을까. 여성들의 위상이야 확실히 당시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여전히 가부장제와 불평등, 억압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나 기혼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경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며, 매년 500파운드에 해당되는 금전적인 지원 역시 전무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는 당대의 현실을 통과해서 빛을 발한다.
우리 각자가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을 소유한다면, 우리가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글로 옮길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습득한다면, 우리가 가족 공용 거실을 조금 벗어나 사람 사이의 관계로만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늘과 나무와 그 무엇이라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사람의 시야를 가로막는 일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기에 밀턴의 겁박을 가볍게 무시한다면,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팔은 없고 우리는 홀로 가야만 하며 우리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세계일 뿐 아니라 실재 세계와의 관계라는 사실을(그것이 사실이므로) 직시한다면 기회는 올 것이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이자 죽은 시인은 줄곧 내려놓았던 육신을 입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p.222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여성과 픽션'을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기초로 쓴 에세이집이다. 그리고 <3기니>는 그 후속편으로 구상된 작품으로, 보통 두 작품을 함께 묶어서 출간되곤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방>은 <자기만의 방>만 수록하고 있어 분량 면에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관련 주제에 대해 더 관심이 생긴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도 찾아서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쓸 당시나 이전까지, 여성은 돈을 벌 기회가 적었고 그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여성의 자유를 남성에게 종속시켰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펼칠 공간도 당연히 없었다.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는 이처럼 자유가 억압당한 공간과 현실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역사상 성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때에 여성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끌어올렸다. 강연 내용을 그대로 정리해 그 형식 그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라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구어체 형식으로 진행되어 기존의 권위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스스로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는 장점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 책에서 실존하지 않는 누군가를 지칭해 '나'라는 화자를 만들고, 자신이 말하는 것 중에는 거짓말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속에 진실이 섞여 있다고 단언한다. 그 진실을 찾아내고 그중 어떤 부분이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를 듣고 (읽는) 우리의 몫이라고 말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여전한 지금, 우리가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