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지도 -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도시들에서 배우다
에릭 와이너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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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전쟁과 격동 그리고 사회를 휩쓴 이념운동을 날씨 이야기하듯 다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씨를 그런 식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씨를 바로 여기서 경험한다. 거대한 저기압대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흠뻑 적시는 소나기, 몸을 뒤흔드는 우렛소리, 얼굴을 벌겋게 익히는 지중해의 태양으로 경험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이야기는 쿠데타와 혁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열쇠와 늘어붙은 커피,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이야기다. 역사는 수백만 개의 일상적 순간을 무수히 합친 것이다.       p.32~33

 

여행하는 철학자이자 철학적 여행가인 에릭 와이너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가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행복과 영성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았던 에릭 와이너는 이 책에서 아테네, 항저우, 피렌체, 에든버러, 빈, 실리콘밸리 등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도시를 찾아간다. 그는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명석한 정신과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 즉 천재가 풍성히 배출된 것일까에 의문을 가졌다. 그 동안의 천재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 내면 혹은 두뇌에 집중되었다면, 에릭 와이너는 천재를 만든 '외부 요인'에 주목한 것이다. 그렇게 위대한 정신을 길러낸 일곱 도시를 직접 걸으면서 인간의 창의성이 품은 ‘도약의 비결’을 탐사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언제 어디서나 걸었다. 그들은 위대한 산책자인 동시에 위대한 사색가였으며 걸으면서 철학하기를 즐겁다. 에릭 와이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두 잔 마시고 가이드와 함께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걸어간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걸으면서 관찰하고, 생각하고, 사유한다. 많은 천재들이 걸으면서 최고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디킨스는 도시가 잠든 밤마다 런던 뒷골목을 걸으며 줄거리를 뜯어고쳤고, 마크 트웨인은 방 안을 서성거리면서 집필한 걸로 알려 졌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그리스인들의 국민적 여가 행위가 바로 '앉아 있기'라는 점이다. 그들은 여름 햇볕을 쬐며 앉기도 하고,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앉기도 하고, 빈도로경계석이나 버려진 골판지 등 아무 곳에나 앉는다. 오늘날 그리스인들이 걷기를 포기하고 앉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상상해보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여행기는 기원전 450년 아테네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현재의 아테네를 넘나 들며 유쾌하게 펼쳐진다.

 

 

 

고백건데 나는 여기 카페인 때문에 왔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빈 천재의 이야기는 커피숍 이야기를 빼놓고는 완성될 수 없다. 이 도시의 역사는 담뱃불 얼룩이 남은 탁자와 퉁명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종업원들의 얼굴에 쓰여 있다. 가게 안에서, 테라스에서, 빈의 천재성이 피어났다. 카페 슈페를에서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일단의 미술가들은 빈 분리파 선언을 통해 빈의 근대미술운동을 일으켰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클림트의 유명한 구호는 과거와의 이러한 단절을 잘 보여준다. 빈의 커피숍은 연주회장처럼 세속의 성당이요, 사상의 인큐베이터요, 지적 교차로였다(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p.391

 

중국 항저우의 한 찻집에서 홀짝거리는 특별한 차의 맛,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위대한 미술가들이 회합을 가졌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어떤 방, 거대한 돌 귀신처럼 현무암에서 삐죽 튀어나온 에든버러성의 놀라움, 작가 키플링이 '무시무시한 밤의 도시'라고 불렀던 콜카타의 생생한 풍경들... 이 책은 마치 여행 에세이라도 읽는 것처럼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든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고,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던 에릭 와이너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지혜를 얻기 위해선 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부단히 여행을 떠나며 실제 경험을 통해 사유하기에 그의 글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덕분에 어렵고 딱딱한 철학도, 지루한 역사도, 에릭 와이너만의 새로운 인문학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에릭 와이너의 여행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다 보면 창조적 천재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철학과 인문학, 지리학과 역사학을 넘나 들며 펼쳐지는 이 매혹적인 여행기를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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