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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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압니까?" 내가 물었다. "우리에 대해서. 우리 가족에 대해서."
"거의 전부 아는 것 같아요. 결혼해서 이리로 오는 조건으로 나는 칼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나쁜 일까지 전부. 나쁜 일은 특히. 탈이 말해주지 않은 일은 여기에 도착한 뒤 내 눈으로 봤고요." 섀넌은 반쯤 감긴 자기 눈꺼풀을 가리켰다.
"그럼 당신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이 아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p.207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 오스, 마을에서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차를 몰고 올라오면 산 중에 농가 한 채가 있다. 그곳은 오프가르 집안의 네 식구가 사는 그들만의 작은 왕국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 전 의문의 교통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동생인 칼은 미국으로 대학을 갔고, 로위는 혼자 남았다. 주유소에서 일하며 십 오년 동안 홀로 지냈던 로위에게 칼이 찾아온다. 동생은 부모님이 물려준 황무지 땅에 거대한 호텔을 지을 계획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산꼭대기에 세워질 스파 호텔이라니.. 호텔이라기보다는 화성의 주유소 같은 분위기에 건설비만 4억이라는데, 칼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칼은 마을 사람들을 투자자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고, 그로 인해 마을 전체가 기대감으로 들썩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로위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평화롭고 고독했던 그의 일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묻어 두었던 비밀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오래 전 그 사건에 대해 재조사하기 시작했고, 로위는 동생을 위해, 가족의 명예를 위해 과거를 은폐해야만 했다. 그는 교도소 따위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진실이 모두 밝혀졌을 때의 수치심과 오프가르 집안이 당할 굴욕을 참을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해야만 했다. 이제 문제는 하나였다.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형은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가. 가족이라는 강한 유대와 의리가 도덕을 넘어서는 순간이 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다른 걸 모두 떼어냈을 때, 가족이란 무엇인가.

 

 

 

오프가르 농장. 작은 집, 헛간 하나, 외곽의 벌판 몇 군데. 저게 도대체 뭐람? 네 글자로 된 이름, 식구 중 두 명이 살아남은 집안의 성. 다른 걸 모두 떼어냈을 때,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수천 년 동안 가족이 협동의 단위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그래, 그렇지. 아니면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는가? 부모, 형제, 자매를 하나로 묶어주는 뭔가가 핏속에 있는 건가?    p.733

 

요 네스뵈는 '가장 잔혹하고 폭력적인 일들은 대개 가족 내에서 혹은 가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법'이라고, 혈연이라는 끊어낼 수 없는 인연 안에서 사랑은 범죄를, 범죄는 사랑을 낳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족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 너무도 친밀해서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존재, 무조건 내 편인 것 같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기이한 존재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게는 그들만의 비밀이 있게 마련이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미우나 고우나'라는 식으로 논리적인 인과관계보다는 무조건 적으로 신뢰해야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믿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진실은 바로 '무조건'이다. 그로 인해 꽤나 큰 댓가를 치루게 되더라도 감수해야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가족의 문제는 외부에서는 절대 알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그건 그냥 견뎌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극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오프가르 일가에게도 그들만의 비밀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히 강한 유대와 결속을 가진 가족이었다. 로위가 열여섯, 칼이 열다섯이던 어느 날, 키우던 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개의 목숨을 끊어주었을 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가족이라고.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고,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고..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자란 두 형제에게는 가족이 옳고 그름보다 언제나 먼저였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유일한 원칙이었고, 다른 건 전부 부차적인 것이었다. 배신과 협박, 사고와 살인, 사기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지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무자비하고 거침없게.

 

해리 홀레 시리즈를 비롯해 요 네스뵈의 전 작품을 읽어 온 나에게도 이 작품은 굉장히 지독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 작품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라면, 그 어떤 것을 마주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만큼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750페이지가 넘는 압도적인 분량이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 없이 탄탄한 구성과 플롯으로 꽉 짜여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첫 장면부터 독자의 목을 틀어쥔 채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요 네스뵈의 필력에 새삼 감탄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더없이 유혹적인 어둠의 지옥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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