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타프 도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7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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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묘비명으로 어떨까?
'그때가 좋았다,'
도시는 언제나 과거가 더 나았다. 헤이세이 시대에는 쇼와가, 쇼와에는 고도성장기가, 다이쇼의 데카당스가, 메이지의 청운의 뜻이, 가장 독창성이 풍부했고 세련된 문화가 정점을 이루었던 에도 시대가.
하지만 필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실제의 묘비명이 아니라 <에피타프 도쿄> 쪽이다. 단서가, 힌트가 어디 없을까.      p.35

 

작가인 K는 <에피타프 도쿄>라는 제목의 희곡을 집필 중이다. 도쿄를 테마로 한 장편 희곡을 구상하며 도쿄에 어울리는 묘비명이 뭐가 있을지 고민한다. K는 자신에게 도시의 비밀을 가르쳐 주겠다는 요시야를 만난다. 요시야는 자신이 사실은 흡혈귀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흡혈귀는 진짜 흡혈귀가 아니라고 말이다. 진짜 흡혈귀는 피를 섭취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 의식이 타자의 육체로 옮겨가 이어지는 거라고, 자신은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도쿄의 오랜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K는 그런 요시야와 함께 '도쿄의 묘비명'을 찾기 위해 도쿄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도쿄 타워, 롯폰기, 진보초 헌책방 거리 도쿄의 풍경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K와 요시야가 도쿄를 배회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상은 흰색 페이지로 <피스piece〉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여성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하는 K의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보라색 페이지로 희곡의 막 구성대로 보여진다. 그리고 자칭 흡혈귀인 요시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인 〈드로잉drawing〉은 짙은 블루 컬러 페이지이고, 연극 상연을 위한 메모는 핑크색 페이지로 되어 있다. 장르와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이야기답게, 각각의 형식에 따라 책의 면지 컬러를 다르게 해서 더욱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그림책이나 동화에서 끝을 맺는 문장으로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게 있잖습니까? 그게 영 찝찝한 겁니다.”
“왜요?”
“모순되잖아요. ‘언제까지고’는 ‘영원히’란 뜻인데 ‘살았습니다’는 과거형. 영원이 끝났죠. 모순 아닌가요?”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는 더 이상하지 않아요? ‘언제까지고’가 ‘영원히’라면 ‘살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행형.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으니까 ‘영원히’는 유보되는 셈이에요. 이것도 모순이죠.”    p.307

 

온다 리쿠의 국내 출연작들은 거의 다 읽었는데, 내 기억에 '희곡'을 제대로 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온다 리쿠의 소설에는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히 많은 편이다. 십여 년 전에 읽었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라는 작품에서 '연극'과 '각본', '현실'과 '허구' 그리고, '극중극'이라는 몇 겹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보여주었던 적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 오랜 만에 온다 리쿠의 희곡을 만나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극중 K의 희곡 <에피타프 도쿄>는 1막 1장과 2막 1장만 수록되어 있어 전체 내용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실제로 현지에서도 이 작품이 발표된 후 작가에게 희곡의 뒷이야기를 공개해달라는 기대평이 쏟아졌다고 하니 언젠가는 온다 리쿠의 온전한 희곡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빠른 속도로 과거가 되어간다. 우리는 과거의 꿈속을 헤치며, 압도적인 크기로 밀려드는 미래를 향해, 현재를 걸어가고 있다. 도쿄라는 도시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격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취를 남기려고 버티는 과거에 반해, 미래는 늘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한다. 이 작품은 '도쿄'라는 도시를 주인공으로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봤다고 생각하는 과거, 하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과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온다 리쿠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강점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모든 것들을 가뿐히 넘어서 새로운 온다 월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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