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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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즐겁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버터가 녹듯이 상대의 눈이 빛나며 드러나는 달콤한 굶주림이 눈에 보인다.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누군가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나쁜 일, 비열한 일,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그런 식으로 느꼈더라... 줄곧 눌러두었던 순수한 감정이 피부로 배어나는 걸 느꼈다. 이거, 멈출 수 있을까, 불안해진다.     p.82~83

 

주간지 기자인 리카는 최근 몇 년 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한 수도권 연쇄 의문사 사건의 피고인 가지이 미나코를 취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가지이 미나코는 결혼 사이트를 통해 만난 남자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세 사람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30대 여성으로 주거불명에 무직이었던 그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꽃뱀'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체포 직전까지 글을 올린, 맛있는 음식과 사치품 사진으로 넘치는 블로그와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데다 뚱뚱한 여성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리카는 세간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꽃뱀 수법’이 아니라, 그 사건에 떠도는 여성혐오를 다루고 싶었다.

 

이 사건은 실제로 2009년 일어나 일본을 경악시켰던 꽃뱀 살인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결혼을 미끼로 만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하고 교묘히 살해한 범인은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여성이었다. 유즈키 아사코는 살인범이 유명 요리교실에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건의 배경에 요리 잘 하는 가정적인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 것이다. 작가는 그녀가 정말 남자들을 죽인 게 맞는지에 대한 미스터리와 함께 피해남성들이 모두 '여성의 돌봄'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정성껏 차린 다정한 집밥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혼자서는 처량하고 볼품없는 가공식품이나 먹었던, 가부장제에서 틀어박힌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순수하게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게 즐거웠던 여자와 그녀의 요리를 숭배하고 보살핌을 받았던 남자들의 이야기는 왜 비극이 되어 버렸을까.

 

 

 

단 한번의 요리가 사람의 마음을 구한다? 그런 건 환상이다. 만약에 가능하다 해도 비할 데 없이 훌륭할 경우에나 그럴 터다. 여자들이 그 환상에 얼마만큼 괴로워하고, 속박되고 있는지. 자신의 서툰 요리가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니, 자기만족과 자아도취가 심하다. 리카가 아무리 정성을 다했어도 아버지의 고독은 해소되지 않았을 터다. 그날 벼락치기로 착한 딸인 척했어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의 죽음을 비극으로 단정해도 되는 걸까.      p.405

 

리카는 가지이 마나코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고 도쿄구치소에도 방문하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가지이의 독점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그녀가 제안하는 음식들을 먹어보거나, 요리를 해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에쉬레 버터를 사용한 버터간장밥을 시작으로 명란젓 파스타, 한정판으로 주문 제작되는 고급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을 요리를 하고, 직접 가서 먹어 보기 시작한다. 그러느라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찌게 되지만, 그 동안 몰랐던 '버터'가 들어간 요리의 풍미와 맛, 그리고 직접 만드는 요리의 가치를 점점 깨닫게 된다.

 

갇혀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는 자의 명령에 따라 대신 움직이며 음식을 먹어주는 관계라니 다소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러면서 묘한 동료애가 생기기 시작한다. 기자인 리카가 살인 용의자인 가지이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그녀가 무죄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지, 리카와 가지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몰입해서 읽었던 작품이다.

 

 

그 동안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은 꽤 많이 읽어본 편이다. <서점의 다이아나>,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나일 퍼치의 여자들>, <책이나 읽을걸> 등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작가인데, 이번 신작 <버터>를 읽으면서 굉장히 감탄했다.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들을 주로 그려내는 작가라고만 생각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탄탄하고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필력은 여전했고,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들여다보는 깊이까지 더해졌으니 말이다.

'소설계의 셰프'라 불리는 작가 유즈키 아사코 답게 그 동안의 작품에서도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등장해왔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종 음식에 대한 묘사가 페이지 곳곳에서 넘쳐 흐른다. 체중 관리를 위해, 살이 찔까봐 두려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등등의 이유로 먹고 싶지 않은 것만 먹고 있는 여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게다가 자신이 먹고 싶은 요리를 시간을 들여 만드는 여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 가족들을 위해, 혹은 누간가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게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여자들을 위한 대리 만족과 판타지를 실현시켜 준다. 극중 가즈이는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먹었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먹었다. '이 팔도 가슴도 엉덩이도 모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니 놀라웠다. 가즈이의 욕망의 대상은 과거 연인이나 동경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고 세뇌하는 사회 속에서, 뚱뚱한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가즈이의 당당한 선택은 압도적인 아우라를 발산한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황금색 달콤함으로 가득한 이 소설을 읽고 고칼로리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면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유즈키 아사코의 이 황홀한 이야기가 당신의 죄책감을 가져가 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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