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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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그리운 부석사' 중에서

 

1973년부터 2021년까지, 정호승의 시인의 50년을 담고 있는 275편의 대표작을 한 권에 담은 시선집이다. 데뷔작인 <첨성대>를 비롯해 널리 사랑받은 <수선화에게>, <산산조각>, 오늘의 시인을 보여주는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당신을 찾아서>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집을 전혀 읽지 않는 이들도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로 시작되는 <수선화에게>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는 국민 시인이기도 한 그는 그 동안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왔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쉽게 읽히는 시들을 써온 시인이라, 50년이라는 긴 시간의 의미가 더 남다르게 느껴진다.

 

특히나 이 시선집은 275편의 시들을 발표 순서대로 배열해 두었기 때문에, 한 편씩 읽는 것만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 세계를 한눈에 만날 수 있다. 혹시 시집이 아직 어렵게 느껴진다면 권말에 실린 김승희 시인과 이숭원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 출간된 동명의 시집의 개정증보판이지만, 130편 이상의 시가 교체되거나 새로 수록되었다. 그러니 정호승 시인의 시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의미있는 시선집이다.

 

 

 

문 없는 문을 연다
이제 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문 안에 있을 때는 늘 열려 있던 문이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갑자기 쾅 닫히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문 없는 문' 중에서

 

정호승 시인의 작품을 절절한 사랑에 대해,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관조하게 하는 서정시들로 기억했는데, 이번에 만난 시집에서는 조금 더 시간의 폭이 넓어서 그런지 무게감이 느끼지는 묵직한 시들도 많았다. 암울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거나, 정치적 억압 등 시대상을 그리고 있는 시들이 인상적이었다. 시인은 서두에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시가 가득 들어 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아직도 시를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시를 조금 편하게 대해도 된다고, 시는 쉽게 읽어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는 초대장처럼 들렸다. 난해성과 다의성으로 다소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여타의 시들에 비해 그의 작품들이 친근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데 있을 것이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바닥은 보이지 않지만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바닥까지 걸어가야만/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로 시작되는 <바닥에 대하여>라는 마음에 남았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 뭉클했기 때문이다.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면 되는데, 그 마음 먹기가 참 쉽지 않다. 바닥의 바닥까지 가보고 다시 굳세게 일어선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을 것이다. 누구나 절망의 끝에서, 암담한 심정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 이 시를 읽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시가 담담하지만 뚝심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테니 말이다.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당신에게, 별을 바라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정호승의 시들을 추천한다. 맑고, 깊고, 단단한 시인의 목소리가 희망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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