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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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진화한 여자들의 삶을 상상했다. 고통스러운 월경과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어디로든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누구에게 보호받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자기 몸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도 다음 생에는 진화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소망했다.      - '로드킬' 중에서, p.24

 

'인간 여자'들이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분류되어 보호소에서 양육되고 있는 미래 사회. 한 때는 전 세계 인구 절반을 차지했었던 여자들은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살게 놔두면 하루도 못 가서 살해당하거나 잡아 먹힐 연약한 인종이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들을 특별하게 보호하고 관리하고 교육해야 할 인종으로 여겼다. 보호소의 소녀들은 성년이 되면 그곳을 떠나 사회로 나갈 수 있었는데, 정부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자격을 검증 받은 남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소녀들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보호소를 나가고 싶어했다. 평생을 갇혀 살았으니 지겹고 갑갑한 게 당연했고, 정해진 규율대로 보호소를 졸업하고 바깥세상의 남자와 결혼하는 미래가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재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 미래에서도 탈출하고 싶었던 소녀들이 있었다. 친구인 두 명의 소녀는 목숨을 건 탈출을 결심한다. 바깥세상에 무슨 위험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자칫 개죽음만 되면 어쩌나 두려웠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당당히 벗어나, 자신들이 모르는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을까. 표제작인 이 작품은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작이다.

 

 

 

남편은 나의 안전을 위해준다.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타인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기를 원한다. 내가 불행하거나 슬프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내 삶에서 나의 안위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다. 나와 나 사이에는 방법 카메라도, 두껍고 튼튼한 현관문도, 잠금 장치도 없다. 나로부터 나를 쫓아낼 수는 없다. 나는 시도때도 없이 나를 침범한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 '외시경' 중에서, p.176

 

이 책은 소설가 아밀의 첫 SF 소설집이다. '아밀'은 작가의 필명이고,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알베르토 망겔의 <끝내주는 괴물들>, 마리사 마이어의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 마이클 로보텀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 제임스 볼드윈의 <조반니의 방> 등 많은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작가의 첫 산문집이었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는 작품은 다정하고 따뜻했던 기억이 나는데, 소설로 만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소설을 쓸 때 굳이 필명을 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것이, 번역가일 때와 소설가일 때 두 자아가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아밀은 〈로드킬〉로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라비>로 2020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환상문학웹진 거울’, ‘공동창작프로젝트 ILN’, ‘브릿G’ 등 기성문단 바깥 플랫폼에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 소설집에는 <로드킬>, <라비>를 비롯해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보호소에 갇혀 결혼 상대가 나타가길 기다리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인 <로드킬>, 현대문명에 둘러싸인 소수민족의 마지막 주술사 이야기 <라비>, 미세먼지 청정지역과 그 밖으로 거주 계급이 나뉜 근미래 한국을 그린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을 소재로 그린 스릴러 <외시경>, 문단 내 성폭력을 소재로 그려진 <몽타주>, 그리고 까마득한 과거, 처녀를 공영하는 어느 섬, 처녀를 구출하는 무사의 이야기인 <공희>이다. 가정 스릴러, SF, 페이크 다큐, 설화 같은 환상 소설 등등 다채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들이 각각 분위기가 전혀 다르면서도 억압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내 딛는다는 점에서는 교집합을 가지고 환상적인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는 소설집이다. 아밀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세계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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