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시간 스토리콜렉터 9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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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우리 둘이 왜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지 명확하게 깨닫고 힘이 빠졌다. 폴 서튼의 현실은 록브리지의 작은 세계였다. 부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살면서 늘 행운이 따랐다. 실패한 첫 번째 결혼 말고는 이렇다 할 풍속 위반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도, 사이코패스의 잔혹한 눈을 마주한 적도 결코 없었다. 굶은 적도, 도망쳐야 했던 적도, 누군가 그의 뜻해 반해 폭력을 가한 적도, 그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사람도 없었다. 폴은 36년 내내 인생의 양지에서 살았고, 그래서 내가 싸워야 하는 그늘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p.50

 

넬레 노이하우스의 ‘셰리든 그랜트 시리즈’ 3부작이 드디어 완결되었다. 2015년 1월에 만났던 <여름을 삼킨 소녀>, 2016년 5월에 만났던 <끝나지 않는 여름>에 이어 6년 만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폭풍의 시간>이 출간되었다. <여름을 삼킨 소녀>에서 열다섯 주인공 셰리든은 강간, 낙태에다 우발적인 살인까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은 모두 맞닥뜨렸다. 이어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 열일곱이 된 셰리든은 시작부터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마주하게 되고,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되어 의붓오빠들을 유혹한 배은망덕한 입양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 10대 소녀에게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고, 덕분에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사랑을 벌이는 모습으로 그다지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작품 <폭풍의 시간>에서는 스물한 살의 결혼을 앞둔 셰리든이 등장한다. 그녀는 네브래스카의 천박한 여자아이나 대량학살자의 여동생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캐럴린 쿠퍼라고 이름까지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참이다. 그런데 웨딩드레스 피팅을 보러 간 날 결코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 이던에게 납치를 당한다. 이던은 잔인한 포주로 과거 그녀의 보스이자 애인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셰리든은 25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약혹자인 폴에게 과거의 이야기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셰리든은 이던과 그의 수하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다 교통사고를 냈고, 덕분에 그들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약혼자에게 과거의 일을 전부 밝혀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폴과 헤어지고, 네브래스카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과거가 놓아주질 않네요. 그렇죠?”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서 쓴맛이 났다.
“셰리든, 누구도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어.” 아버지가 대답했다. “자기 삶의 구성요소로 만들고 그것과 화해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그리고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아.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까.”     p.254

 

셰리든은 그렇게 5년 만에 네브래스카로 돌아온다. 자신이 평생을 알던 호의적인 사람들에게로, 그녀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냥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로 말이다. 셰리든은 자신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외로웠던 감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 동안 필사적으로 사랑과 인정을 찾으려고 여러 남자를 만나왔고, 상처를 받을수록 절망감은 커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새로운 시작을 해볼 수 있을까.

 

극중 셰리든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했던 말처럼 '인생이란 결정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부분 감정에 따라 대부분의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는 우연이나 운명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자신이 내린 결정의 총체일 뿐이다. 세 작품을 거쳐 오면서 셰리든에게는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마지막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수 많은 결정과 기회 속에서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는 얼마만큼 믿어도 되는 건지, 갈등하고, 고민하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녀에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낮에는 잠잠했던 과거의 유령들이 밤에는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혔고, 속수무책의 분노와 눈물, 그리고 얼굴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저 한 소녀의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들을, 그야말로 폭풍같은 시간을 거쳐온 셰리든이기에 그래도 결국에는 희망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셰리든 그랜트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완결이 될지는 직접 책을 통해 만나보아야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로 대표되는 '타우누스 시리즈'로 독일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넬레 노이하우스지만, '셰리든 그랜트'시리즈 또한 그에 못지 않는 수작이기 때문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자신의 모든 여자 주인공 가운데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셰리든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타우누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그녀가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 셰리든의 이야기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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