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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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체계화하고, 규칙적인 정복 활동의 일환으로 삼고, 애인의 이름을 '할 일 목록'에 넣고 체크 표시를 하기. 애욕을 죽이는 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돈 후안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유혹자이고, 유혹자라기보다는 수집가이며, 수집가라기보다는 저격수에 가깝다. 돈 후안과 일견 유사해 보이는 다른 바람둥이 인물들은 명확한 목적에 따라 애정 행각을 벌인다.... 그러나 돈 후안은 다르다. 그의 행각에는 동기가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다.     p.86

 

이 책은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직했고,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자 '책의 수호자'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신작이다. 총 37편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동화와 코믹북, 신화, 전설, 고전을 망라하는 텍스트들에서 길어 올린 문학 작품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망겔은 수년 전 신문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다뤄보기로 했다. 그는 이 수많은 등장인물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문학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그 유명한 대사,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널 믿을게' 처럼 말이다. 우리가 그 등장인물들의 존재를 믿고 나면, 그들 또한 우리를 믿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들이 꽤 등장한다는 점이다. 햄릿이 아니라 거투르드를, 홀든 콜필드가 아닌 피비를, 돈키호테가 아닌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를, 보바리 부인이 아닌 보바리 씨를 다루는 식이다. 주인공에 비해 평범하고, 매력이 없고, 그다지 공감을 받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보이는 이들 안에서 망겔은 어떤 이야기를 발견했을까. 그리고 망겔은 왜 이 캐릭터들을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서가인 망겔이 추억하는 신화와 전설, 문학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상상의 친구들 속에서 그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잊지 못하는 캐릭터들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상상 속 친구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화는 우리 세상에서 암울하고 공포스러운 많은 부분들을 특유의 은근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회의주의자인 우리는 동화에 거짓, 가짜 희망, 공상 같은 의미를 부여해왔지만, 백 년간의 잠으로 저주를 풀 수 있으리라거나, 이빨을 드러낸 포악한 짐승이 기대감을 안고서 우리 할머니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리가 좀처럼 잊지 못하는 까닭은 불신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일 것이다.     p.294

 

그 누구도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그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망겔의 말처럼,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서 목록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성격, 습관 등을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각각의 서재를 이루고 있는, 내가 읽었던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의 목록이야말로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이자, 세계이며,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끔 내 서재를 둘러보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당시의 날씨며 풍경들이 고스란히 함께 떠오르곤 한다. 마치 시간이 멈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각각의 책 속에는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시간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망겔은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었던 걸로도 유명하다. 말년의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 주었던 서점 소년이 어느 덧 노년이 되었다. 그가 긴 시간 동안 자신과 함께해온 가상의 친구들을 추억하면서 써 내려간 이 책은 문학을 재료로 삼아 쓰는 자서전이자, 문학의 가치에 바치는 찬사이기도 하다. 표지를 비롯해 각 장에는 망겔이 가상의 친구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직접 그린 캐릭터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별히 한국어판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메시지와 서명이 함께 실려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때로 잘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들이 진짜 육신을 지닌 우리 친구들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 책을 꼭 만나봐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고전 문학 속 캐릭터들이 텍스트의 세계를 초월해 우리 삶을 인도해줄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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