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딜레마
B. A. 패리스 지음, 김은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평점 :
속 좁은 생각인 건 나도 안다. 사실 그런 생각은 그 힘들던 시간을 떠올릴 때만 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게, 걱정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게 어떤 건지 남편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게 어떤 건지. p.174
애덤과 리비아 부부는 학생 때 아이가 생겨 결혼한 탓에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리비아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마흔 살 생일에는 여러 사람들을 초대한 큰 파티를 열고 싶어 했다. 딸인 마니는 홍콩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 중이고, 아들인 조시는 이번 여름에 인턴으로 채용되어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다. 마니는 파티에 맞춰 집에 오고 싶어 했지만 시험 일정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깜짝 선물이 되기 위해 마니는 밤늦게라도 집에 오는 걸로 아빠와 따로 말을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고대하던 파티 당일, 남편과 아내는 딸 마니와 관련된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실 리비아는 마니가 파티에 오지 않기를 은근히 바랬다. 왜냐하면 딸이 처자식이 있을지도 모를 남자와 깊은 관계였고, 임신 12주 상태에서 유산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니는 아빠와 조시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고, 리비아는 딸의 바람을 존중했지만 남편에게 비밀로 한 채 그 사실을 혼자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엄마 몰래 집에 오기로 한 마니를 기다리는 애덤은 휴대전화로 뉴스 속보를 보고는 충격에 휩싸인다. 마니가 탈 예정이었던 비행기가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전원 사망으로 추정된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마니와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애덤은 정확한 소식을 알아보기 전에 아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파티가 아내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와 남편은 각자 상대의 세계가 무너지기 전, 가능한 오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던 마음에서 엄청난 비밀을 당분간 혼자 알고 있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그 결정은 앞으로 닥쳐올 파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이들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당신을 보호하고 싶어서 그랬어. 우리가 갖고 있던 걸 지키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럼 당신은 언제 말하려 했던 거야? 절대 비밀로 하려 했어? 아니면 당신 파티가 끝나고?"
나는 뒤로 손을 뻗어 베개를 잡았다. "나가!" 베개를 남편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나가서 돌아오지 마! 당신을 증오해. 알아듣겠어? 당신을 증오한다고!" p.373
군더더기 없이 빠른 전개는 첫 페이지를 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들어 주었던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를 만난 것이 벌써 4년 전이다. 사랑받는 완벽한 아내는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이며, 아름다운 저택은 감옥이고, 매 맞는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변호하는 법률가가 실은 사이코패스였다는 전제로 완벽해 보이는 결혼이 실은 완벽하고 치밀하게 조작된 거질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역대급 데뷔작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브레이크 다운>에서는 정신적, 심리적 폭력이 얼마나 극한의 공포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고, 세 번째 작품인 <브링 미 백>은 상상조차 못했던 짓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반전 스릴러로 여전히 페이지 터너로서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세 작품 모두 6월에 출간되었기에,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생각나는 작가가 되어 버렸는데, 어김없이 이번 신작도 6월에 만나게 되었다.
B. A. 패리스는 너무도 인상적인 데뷔작을 썼던 탓에 그만큼의 임팩트를 이후 작품에서는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 왔던 독자들이나,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많이 읽어 왔던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지점, 금방 눈치를 챌 수 있는 단서들이 많아 상황 파악이 너무 빨리 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갈등을 겪게 되는 고민에 대한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제목을 딜레마라고 했는데, 두 가지 사항 중에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면 양쪽의 고민이 비슷한 무게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비밀을 가지게 된 이유나, 남편이 아내에게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독자로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딸이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유뷰남과 불륜을 저지르고 아이를 가져 유산까지 했는데, 그 상대가 남편의 절친 동생이자 가족들 모두와 친분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면, 단순히 딸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고 엄마가 그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될까? 게다가 아내의 마흔 번째 생일 파티를 망치지 않기 위해, 딸이 탔을 지도 모르는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듣고도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겠다는 아빠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비밀을 간직한 두 사람의 시점을 팽팽하게 교차 진행하며 쌓아 올린 긴장감에 비해 결말도 조금 단조롭게 느껴졌다.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B. A. 패리스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것은 틀림없다. 데뷔작만큼 놀랍고, 독창적인 그녀의 다음 작품을 고대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