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71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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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내 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엔지니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미로에서 나가는 길을 알기라도 하는 양. 이 순간 내 적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이 우세했는지 나는 모른다. 분노였는지 초조함이었는지 흥분이었는지 짜증이었는지, 아니면 실망이었는지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든 간에 그는 그것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그의 얼굴은 다시 정중하고 친절한 표정을 띠었다.    p.87

 

1909년 9월 26일, 요슈 남작은 유명 궁정 배우인 오이겐 비쇼프 집에 친구들과 함께 방문을 한다. 바이올린을 챙겨 간 그는 친구들과 실내악 연주를 하고, 오이겐 비쇼프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오싹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밤 늦도록 잠을 못 이룰 겁니다....'로 시작된 그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한 자살 사건이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젊은 장교에게 화가인 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다고 한다. 유서조차 없었기에 유족들은 납득이 가지 않았고, 형이 진상 조사에 나선다. 형은 동생이 살던 집으로 이사해, 동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살의 원인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고, 그는 결국 동생처럼 자살을 하고 만다. 그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오이겐 비쇼프는 잠깐 자리를 비운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권총 자살을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 남겨진 가족들과 손님들은 요슈 남작을 비쇼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로 지목한다. 그는 비쇼프의 아내와 과거 연인 사이로 그녀에게 아직 연정을 품고 있고, 비쇼프의 자살을 유도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명을 벗기 위해 요슈 남작을 비롯한 일행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면서, 이러한 자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연 요슈 남작은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연쇄 자살 사건들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일 만 쉰 살이 되고,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를 피한 끝에 오늘 진실을 고백하고, 그날 밤 조반시모네 키기, 일명 카테반차에게 닥친 일을 회고록으로 남기려 한다. 대단히 유명한 건축가이자 화가인 그를 오늘날 사람들은 <심판의 날의 거장>이라고 부른다. 내가 나 자신과 모든 피조물이 용서받기를 바라듯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p.204

 

레오 페루츠의 작품은 전부터 궁금했던 터라 <9시에서 9시 사이>가 나왔을 때부터 구매해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스웨덴 기사>, <심판의 날의 거장>이 나오기까지 시작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서 읽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 상태로 먼지가 쌓여 가고 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 출간된 <심판의 날의 거장>을 처음으로 레오 페루츠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레오 페루츠는 '환상 문학의 거장'이라는 문구로 설명되는 작가인데, 여기서 환상문학이란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말한다. 물론 기이한 일을 표현한다고 해서 모두 환상문학이라고 하지는 않고, 보통 ‘단절과 공포감’, ‘애매성과 의혹’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자연스레 미스터리와 공포를 유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가독성도 좋은 편이다.

 

대표적인 환상 문학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오 페루츠와 프란츠 카프카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라는 점도 흥미롭다. 생전보다는 사후에 명성을 얻은 카프카에 비해 페루츠는 당대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고 한다. <심판의 날의 거장>은 페루츠의 전성기 대표작으로, 당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고전들에 비해서 굉장히 잘 읽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앨프리드 히치콕, 그레이엄 그린, 이언 플레밍 등 세계의 많은 거장들이 페루츠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현대의 장르 문학들에 견주어도 될 만큼의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환상 문학으로서의 작품성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서스펜스, 추리, 공포와 환상이 절묘하게 조합된 이 작품을 만나 보자. 능숙한 이야기꾼 페루츠의 솜씨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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