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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완벽한 스파이 1~2 - 전2권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평점 :

핌은 탑승권을 잘게 찢어 재떨이에 버렸다. 어디까지가 계획이고, 어디까지가 임기응변이었을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행동할 때지, 고민할 때가 아니니까. 버스 티켓, 히스발 레딩행. 가는 동안 비가 내렸다. 레딩발 런던행 편도 기차표는 상대를 속이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그는 이 표들도 잘게 찢어 역시 재떨이에 버렸다.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공격적인 심리 때문인지, 하여튼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종잇조각 더미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 뒤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붙박인 듯 불꽃을 바라보았다. - 1권, p.52
50대 초반인 매그너스 핌은 소년처럼 앳되어 보이면서도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그는 영국 정보부의 비밀 요원으로 아버지 릭의 장례식을 위해 런던에 갔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는 지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데번주 남부의 바닷가 마을에 도착한 참이다. 한편 빈에서는 그의 아내 메리 핌과 1시간 동안 창가에 서서 차가 오기를, 초인종이 울리기를, 남편이 집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는 지금쯤 공항에 세워 두었던 자동차를 몰고 저 길을 달려와 집에 도착해야 했을 거였다. 하지만 그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고, 남편 대신 그의 상사인 잭 브러더후드가 집에 찾아온다. 다급하게 여러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잭 브러더후드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고, 핌이 전에도 이렇게 사라진 적이 있는지, 그가 좋아하는 자신만의 은신처가 있는지 다그치듯 묻는다.
만약 그가 국가와 동료와 가족을 배신한 거라면, 이 일은 절대 새어 나가면 안 되는 극비사항이었다. 게다가 핌이 실제로 체코 정보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축적됨에 따라 그를 추격하는 잭과 메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핌은 아내의 예상대로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일까. 아니면 상사의 짐작대로 동료를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려는 걸까. 이야기는 빈에서 핌을 찾으려는 이들의 모습과 바닷가 마을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쓰고 있는 핌의 모습이 교차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핌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차곡차곡 쌓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를 비롯해 한 남자의 숨겨 왔던 삶이 펼쳐진다. 담담하면서도 파괴적으로, 우아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무엇보다 이 작품이 르카레의 특별했던 아버지와 진실했던 친구,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바탕이 된 자전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처음에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에 그의 감수성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래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이 몬트리올로 갈 수 있게 해줄게요. 그래요, 캔버라에 있는 당신 어머니에게 당신이 여기 무사히 잘 있다는 말을 전해 줄게요. 처음에 핌은 자신이 고생을 겪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가 심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직 젊은 그가 평생 겪은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루에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것이 분했다. - 2권, p.271
이 작품은 스파이문학의 거장, 존 르카레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의 스물네 번째 장편소설로 르카레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극중 매그너스의 아버지인 릭 핌의 인생에 실제 자신의 아버지가 거쳐온 종횡무진 인생을 거울처럼 반영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사립 탐정 두 병을 고용해 아버지가 처음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의 법원 기록과 신문 보도에서부터 여러 나라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문서들을 손에 넣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대한 배경은 2권의 후반부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책을 포함해서 평생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없었다면 아들이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르카레는 '유년 시절은 소설가의 통장 잔고'라는 그레이엄 그린의 말에 기대어, 어떤 면에서는 십중팔구 아버지의 말이 옳을 거라고 말한다. 르카레가 실제 유럽에서 활동하는 비밀 요원이었고,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는 작품의 성공으로 요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꽤 많이 소개되었는데, 사실 읽기에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는 그의 작품은 스파이 문학이라는 장르적 재미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이상, 도덕과 정치 등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을 때 어느 정도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시간을 들여 페이지를 넘길 수록 묵직한 만족감을 안겨주는 작품들임에는 분명하다. 르카레의 작품을 사랑해온 독자라면,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가있는 이 작품은 꼭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