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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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마는 어울리지도 않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몰라도 과장님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서 선배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더군. 이렇게까지 관계가 파탄 나려면 대체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유를 들으면, 우리의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가 이해가 안 될걸."
"그렇다면 왜 그런 태도를 그만두지 않는 건데?"
"'습관이 성격이 되다'라는 거지."         p.101~102

 

니시신주쿠의 변두리 쇠락한 거리에 있는 와타나베 탐정사무소, 와타나베가 죽은 지 이미 십칠팔 년쯤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사와자키가 파트너 없이 혼자 일을 하고 있다. 이제 오십대에 접어든 탐정 사와자키는 근처 흥신소에서 하청 받은 잠복근무를 마치고 사흘 만에 사무실에 들른 참이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방문한 것은 오십대 중반의 남성으로 '신사'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은행의 지점장으로 자신의 회사에 대출이 예정된 요정 여주인의 사생활 조사를 의뢰한다. 그는 일주일치 요금과 경비 일부라며 30만 엔을 선지급하고, 다음 주 토요일에 자신이 연락을 하거나 방문할 때까지 먼저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사와자키가 그 의뢰인을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다음날, 한 달 가까이 계속해왔던 잠복 근무 업무가 끝이 나서 의뢰인에게 의뢰 받은 일을 시작하는 사와자키는 조사를 하자마자 그 여자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의뢰인과는 연락이 되질 않고, 사와자키는 그를 만나러 의뢰인이 근무하는 은행을 찾아간다. 자리를 비운 의뢰인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권총을 든 남성 이인조 복면 강도가 은행에 나타난 것이다. 그 와중에 자리를 비운 의뢰인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은 흘러가고, 결국 행방불명 상태가 된다. 의뢰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가 의뢰한 일은 당사자의 사망으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의뢰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조사를 맡는 바람에 결과를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얼빠진 상황에 놓이게 된 사와자키는 난감해진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비교하기도 어리석지만 탐정의 업무란 참으로 애잔한 것으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나 이외에 누구도 모른다. 흥신소에 소속된 탐정이라면 개략적인 사항을 보고서로 작성할지 모르지만,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는 어디를 찾아도 보고서 한 장 발견할 수 없다. 내가 관여한 조사의 의뢰인이나 관계자들은 '나의 일'을 기억할까? 기억한다고 해도 대개 하루빨리 잊고 싶은 불쾌한 기억이리라. 불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런 '탐정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p.354

 

너무 너무 좋아하는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가 돌아 왔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 이후 9년,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시즌 2의 개막을 알리며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가 출간되었고, 이번에 나온 <지금부터의 내일>은 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이자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되겠다. 중간에 단편집 <천사들의 탐정>도 있었으니,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작품은 현재까지 여섯 작품이 출간되었다. 전작인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이후로 무려 14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출간된 시즌 2의 두 번째 작품이다. “소설의 진정한 재미, 그것만을 생각하며 쓰고 또 썼다. 그 밖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제법 두툼한 페이지에다 천천히 진행되는 이야기이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하드보일드’이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텐데,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가 문체와 스타일을 구축해낸다. 불필요한 수식을 뺀 무덤덤하고 시크한 행동,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조차 무모하게 용기 있는 순수함, 머릿속으로 손익을 계산한다거나, 자신이 피해를 볼만한 상황에서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한다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인 사와자키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음식으로 치자면 '맛'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이게 된다.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내용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각 권을 골라서 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기왕이면 걸작이었던 시리즈 첫 작품부터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자타공인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스타일리스트 하라 료가 그려내는 근사한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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