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행하게도, 사전에는 문자로 된 출처가 없는 단어들을 포함할 여력이 없단다. 어떤 단어든 글로 쓰인 적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출처라는 것이 대체로 남자들이 쓴 책들일 거라는 너의 가정은 옳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야. 당연히 비주류에 속하는 말들이긴 해도, 많은 인용문들이 여성에 의해 쓰였단다. 어떤 단어들의 출처가 기술 매뉴얼이나 전단지를 뛰어넘는 그럴싸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너는 놀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약병에 붙은 라벨에서 찾아낸 단어를 최소한 하나는 알고 있고 말이야.     p.159~160

 

엄마 없이 아빠와 단 둘이 사는 어린 에즈미는 아빠와 단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 했다. 에즈미는 우편물을 뜯어보는 아빠의 무릎에 앉아 단어들의 소리를 듣고, 단어를 분류하는 방법을 배우곤 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자인 아빠와 함께 사전이 만들어지는 편집실에서 매일을 보내던 에즈미는 어느 날 단어 쪽지를 하나 줍게 된다. 영어로 된 모든 단어가 엽서 크기의 종이쪽지에 하나씩 적혀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쪽지들은 수백 개의 분류함 칸에 보관되었다. 삽과 갈퀴 대신에 단어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스크립토리엄은 마법의 장소였다. 어느 자리에나 책 더미가 쌓여 있었고, 모든 칸에 쪽지들이 꽉 들어차 있는 분류함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졌다. 어린 에즈미에게 그곳은 '존재한 적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에즈미는 우연히 주운 단어 쪽지 하나를 시작으로 조금씩 사람들이 '잃어버린' 단어들을 모으게 된다. 그렇게 ‘거절당한/거절당할 법한’ 여성들의 단어들을 하나 둘 모아 자신만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낡은 트렁크 안에 꾸린다. 사전의 엄숙한 권위에서 밀려난 말들, 사전을 만드는 남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단어들이 그 속에 쌓여가고, 에즈미는 그 단어들이 주로 여성들의 언어라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된다. 단어들은 어떤 세계를 설명해주고, 누군가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준다. 하지만 모든 단어들이 사전에 수록될 수는 없었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성장하는 에즈미는 공식적인 세계 이면에 있는 다양한 언어들과 여성들의 세계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단어에는 끝이라는 게 없다. 그 의미에도,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에도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들의 역사는 너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대의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원본의 메아리, 혹은 왜곡된 버전을 듣고 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종종 그 반대로 생각하곤 했다. 기이하게 생긴 옛 단어들은 그것들이 결국 취하게 될 형태의 서투른 초안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우리 시대, 우리의 혀 위에서 빚어지는 단어들이야말로 진실하고 완결된 것이라고.     p.295

 

꽤 오랫동안 문장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책을 읽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만나면 적어 두는 노트였다. 원하는 책을 모두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에 책을 빌려 보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책을 반납하거나 돌려 주어야 했고, 그러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니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내 안에 담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을 수집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근사한 작품을 만났다.

 

매 페이지마다 문장과 글과 말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실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주인공 에즈미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실존 인물이며, 완간까지 70여 년이 걸린 초유의 프로젝트였던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만드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단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 그래서 모든 단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너무도 뭉클하고 설레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단어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변화하고, 말해질 필요가 있는 것에 맞춰 확대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니 단어들은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다면, 역사 속에서 누락된 여성들의 언어를 만나 보고 싶다면,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찾고, 삭제된 세계를 복원하는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