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죽음,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
패트릭 스벤손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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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울가에서 아버지와 뱀장어 혹은 뱀장어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우리 부자가 대화를 나누기는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 우리가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별다른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는 장소,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장소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비친 달빛, 바람에 흔들려 쉭쉭 소리를 내는 풀, 나무의 그림자, 늘 변함없이 흐르는 개울, 이 모든 풍경 위를 맴도는 별표 같은 박쥐들. 그 풍경의 일부가 되려면 침묵해야 했다.       p.18

 

이 책은 인류에게 오랫동안 신비로움과 궁금증의 대상이었던 유럽 뱀장어인 앙귈라 앙귈라를 소재로, 스웨덴의 신문기자가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인생 회고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며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역사, 생물학, 해양학, 문학, 철학 등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깨달은 것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뱀장어는 한 장소에서 5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하니, 매우 긴 삶을 살아가는 편이다. 각종 신화와 전설에 따르면 백 년 이상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뱀장어는 살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번식하겠다고 결정하고, 그와 동시에 고요한 생활은 끝나고 바다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낚시를 하러 갈 때만큼은 다정하고 자상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앙귈라 앙귈라 낚시라고 한다. 앙귈라 앙귈라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출생지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에 대해,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느 곳보다 먼 곳으로 돌아가는 지난한 여정에 대해서 처음 알려준 것도 바로 아버지였다. 그들이 어떻게 달이나 태양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길을 찾아가는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해한 이유로 어떻게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뱀장어의 탄식과 번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어떤 인간도 번식하는 뱀장어를 보지 못했고, 다른 뱀장어의 난자를 수정시키는 뱀장어도 보지 못했다고 하며, 유럽 뱀장어를 잡아둔 상태에서 산란하게 만들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뱀장어가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뱀장어의 일생과 번식에 대해 알고 있는 상당수가 가설에 근거한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시간이 믿을 수 없는 친구이며 1초 1초가 아무리 느리게 지나가도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는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고향과 유산을 가지고 태어나며 이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어쩌면 성공할지 모르지만,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없다면 인생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문득 갑작스런 계시를 받듯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평생 어두운 우물 바닥에서 산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p.195

 

좀처럼 으스대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 않으며,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먹는 뱀장어는 멀찍이서 방관하며, 어떤 관심과 인정도 바라지 않는다. 자아도취적이고 자만심이 강한 물고기처럼 보이는 연어와 비교해서 그 습성을 설명해주는데,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둘 다 이동하는 물고기이고, 민물에서도 바닷물에서도 살며 변태를 거치지만, 둘의 생활사는 가장 본질적인 측면에서 달랐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난을 떨지 않으며, 자기 형편에 만족하는 물고기라니, 어쩐지 근사하게 느껴졌다. 시종일관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읽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이 인간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떻게 하면 사람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그토록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앙귈라 앙귈라의 삶이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줄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낚시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왜 사람들이 낚시를 하러 다니는지, 한 번 그 매력에 빠지면 계속 가게 되는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물고기의 생애를 통해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깨달음들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유럽 뱀장어인 앙귈라 앙귈라의 경우, 과학과 지식이 진일보한 오늘날조차 그 생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이첼 카슨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연구하고 분석했던 개체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떤 관심과 인정도 바라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물고기로부터 인생의 태도에 대해 배워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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