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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산문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6
조지 오웰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9월
평점 :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고,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책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기나긴 병치레와 같아서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싸움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악마에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일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악마는 아기가 관심을 끌려고 울부짖는 것과 똑같은 본능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 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p.18
조지 오웰은 뛰어난 소설가인 동시에 민주적 사회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인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하고, 영국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문학의 역할을 고민하는 사색가이기도 했다. 그는 <1984>와 <동물 농장>등 소설 만으로도 20세기 영문학의 독보적인 작가이지만, 사실 여러 매체에 수많은 빼어난 에세이들과 칼럼들을 기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오웰의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 받는 20여 편의 산문들을 종류별로 골고루 엄선한 선집이다.
흥미로운 에세이들이 많았는데, 책과 문학, 서평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글들이 유독 흥미로웠다. 우선 <책과 담배>라는 글에서 '책을 사는 것, 책을 읽는 것이 너무 값비싼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당 비용의 관점에서 독서에 정확히 얼마나 드는지' 분석하고 있다. 우선 자신이 가진 책들의 가격을 전부 더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헌책으로 구매한 책들, 받았거나 도서 상품권으로 구매한 것들, 서평용 책이나 증정본 등등으로 구분해 권수를 파악하고 각각에 맞는 가격을 책정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가진 책은 총 9백권에 가깝고, 비용은 165파운드 15실링, 이것은 대략 15년 동안 축적된 결과이다. 거기서 1년 독서에 드는 비용과 15년간 총 독서 비용을 계산하고, 이것을 다른 비용과 비교해본다. 결론은 독서 비용이 담뱃값과 술값을 합친 금액을 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책값과 우리가 책에서 얻는 가치의 관계를 정립하기는 어렵겠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글이었다.
모든 책에 서평을 쓸 가치가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한 그 무엇도 고칠 수 없다. 수많은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절대 다수의 책을 과찬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전문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책이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쓸모없다>가 객관적으로 진실한 비평인 책이 열 권 중 아홉 권을 넘을 것이고, 서평가의 진실한 반응은 <이 책은 나에게 그 어떤 흥미도 주지 못했고, 나는 돈을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의 평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돈을 내고 그런 평을 읽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독자는 추천하는 책에 대한 안내를 원하고, 일종의 평가를 기대한다. p.107
이 책에는 파리 15구의 어느 병원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 쓴 글도 있고, 부랑자 임시 수용소에서 지냈던 리얼한 경험을 쓴 글도 있으며, 헌책방에서 책 장사라는 일을 하면서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글도 있고, 뉴스에 수록되는 영국의 살인 사건들의 대한 통계와 논평도 있다. 무엇보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들이 뛰어난 점은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경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의 에세이들에는 그의 사상과 문학을 이루는 기초가 된 단상들과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실제로 오웰은 자신의 에세이들을 발전시켜 여러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밖에 그의 에세이들에는 어린 시절 괴로웠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 대학에 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 경찰 공무원에 지원하여 버마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실상을 목도하며, 환멸과 자괴감으로 이내 사표를 던지게 되었던 그의 삶들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특히나 국내 최초로 완역 수록된 꽤 분량 있는 에세이 '사자와 유니콘: 사회주의와 영국의 특질' 이라는 글도 포함되어 있으니, 오웰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