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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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이유는 누구를 위한 거지? 처음으로 사형 판결의 이유를 듣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음을 선고받을 사람에게 그만 수긍하라고 들려주는 걸까. 아니면 분노에 사로잡힌 유족과 시민에게 이제 후련해하라는 뜻일까. 낭독은 십 분 이상 계속됐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한동안 더 이어진 끝에 재판장은 고개를 한 번 살짝 끄덕였다. 침묵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낀 직후였다.
“주문, 피고인을…….”
한층 높은 목소리가 법정 안에 울렸다.
“사형에 처한다!”       p.31

 

다나카 유키노는 헤어진 옛 연인 게이스케의 집에 불을 질러 그의 아내와 쌍둥이 아이를 죽게 만들었다. 요양원에 근무하는 게이스케는 야간근무 탓에 화를 면했으나, 아내의 배 속에는 여덟 단 된 태아도 있었다. 유키노는 사건이 일어나기 이 년 전에 게이스케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수긍할 수 없어 끊임없이 그를 스토킹 해왔다. 게이스케는 유키노에게 150만 엔 가까운 빚이 있었지만, 결혼 후 조금씩 갚고 있었고 아내가 알게 되어 장인 어른의 도움으로 나머지 잔액까지 모두 변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키노의 스토커 행위는 잦아들지 않았고,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사건 이후 수사는 매우 빨리 진행되었고, 방화 사건은 신문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목격자의 증언과 게이코의 아내에게서 걸려온 마지막 전화, 유키노의 집에서 압수된 일기와 그녀의 과거 이력까지 범행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유키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열일곱 살의 호스티스였으며, 새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 중학교 시절 불량서클에 발을 들였고, 강도치사 사건을 일으켜 아동자립지원시설에 입소한 적도 있으며, 방화 사건 몇 주 전에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게다가 그녀는 범행에 대한 반성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결국 사형이 구형된다. 그녀는 정말 희대의 괴물인 걸까.

 

 

"네가 장차 어떤 일을 하든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게 있다. 상대가 무엇을 바라는지 진지하게 상상하려무나."
"상상요? 그냥 이야기를 들으면 되잖아요."
.... "인간이란 꽤 복잡한 생물이라서 말이다. 생각하는 걸 다 말로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언젠가 네가 만날 누군가는 네가 뭐라고 해줄지 기대할 거야. 그런데 잘 설명할 수 없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할 수도 있지. 그러니 그 누군가를 진솔하게 대하고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상상해주어야 한단다."     p.236

 

이 작품은 일본 도서 차트 역주행의 신화를 만들며 입소문 만으로 50만 부를 돌파했다. 쓰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드라마 <이노센트 데이즈> 원작 소설이기도 한데, 파격적인 구성과 충격적인 결말로 드라마로도 매우 화제였다고 한다. 우선 구성이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초반 프롤로그에 사건의 간략한 개요와 사형 판결까지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재판장이 사형을 판결한 판결 이유들이 각 장의 제목이 되어, 실제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고, 판결 이후 현재의 상황들을 보여 주고 있다.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양부의 거친 폭력에 시달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강도치사 사건을....
죄 없는 과거의 교제 상대를...

 

... 등으로 사형 판결의 이유가 이어졌는데, 그 각각의 이야기들 속에 있는 진실에 대해서 가족부터 학교 동창, 애인의 친구, 동네 주민, 담당 의사, 교도관 등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증언과 고백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겉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독자들을 함께 분노하게 만든다. 꼭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씩 사실이 왜곡되었고, 진실을 알고 있는 몇몇이 석연찮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음에도 나서지 않았고, 누군가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고,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식의 이야기라 순식간에 빠져 들어서 홀린 듯이 읽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작가인 하야미 가즈마사는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선택함으로써 읽는 내내 간절히 바랬던 독자들의 마음을 보기 좋게 외면한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게 만들지만, 그만큼 이야기가 가진 힘이 압도적인 몰입감을 안겨주는 작품이라 한 동안 그 여운에 시달려야 했다. 역주행 신화의 이유를 만나보고 싶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는 미스터리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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