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들 눈에는 참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도쿄에서도 손꼽히는 고급주택가에 살고 있고 남편은 의사다. 열흘에 한 번씩 비싼 초밥을 시켜 먹고 쇼핑을 가서도 가격표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카트에 담을 수 있다. 그런 생활이 요즘 들어 점점 숨 막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는 모른다. 어쨌든 돌아가고 싶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정말로 내가 있을 곳이 있지는 않을까?     p.89

 

대기업 홍보과에서 근무 하는 서른 넷 마유미는 빨리 결혼을 하고 싶지만, 마음에 딱 맞는 남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20대에는 애인 없이 지낸 시기가 없었을 정도였지만, 그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결혼이라는 티켓만 손에 쥐면 인생의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게 될 것 같았지만,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큼 괜찮은 남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 중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대학 한 학년 선배인 도모아키를 만나게 된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진 미남 의사, 하지만 마유미에게 그는 절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였다. 그는 대학 시절 마유미가 아꼈던 후배 A를 성폭행했고, 그 일로 A는 학교를 그만두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랜 만에 만난 도모아키는 당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은 마유미였으며, A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다가 안되니 자신을 유혹해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말한다. 마유미는 그의 고백에 서서히 마음이 흔들리고, 결혼 상대로 완벽한 조건을 가진 그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결혼 8년 차인 유카리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간호사로 일하다 한 살 연상의 의사였던 남편을 만났고,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고급주택가에 있는 큰 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 출근 후 청소와 빨래, 장을 보고 식사 준비 등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시부모는 손주가 생기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남편은 매일 밤 늦게 집에 들어왔고 작년부터 8개월 째 전혀 아내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유카리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로 말이다. 유카리는 가끔 자신이 남편에게 어떤 존재일까 생각한다. 아내도 아니고, 어머니도 될 수 없고, 그저 동거인 혹은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온종일 청소와 빨래로 시간을 보내고,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을 위해 간단한 야식을 만들어 주는 게 반복되는, 혹은 전부인 결혼생활이 점점 숨 막히게 느껴지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 말이 없었다. 헤어져 달라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불륜 관계를 계속 유지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유카리는 무릎 위에 들고 있던 찻잔을 한쪽에 내려놓더니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려요. 이대로 남편이랑 사귀어 주세요."
"왜, 왜 이래요? 이러지 말아요."      p.257

 

유카리가 남편의 외도를 눈치챘을 무렵, 마유미도 도모아키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유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결혼이라는 티켓이 가짜였다는 사실에 분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이대로 조용히 물러서기에는 너무 억울했고, 그에게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해 후회할 만큼의 상처를 안겨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하지만 그의 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참을 수 없이 궁금했고, 그의 집 근처에서 마침 외출하는 그녀를 미행한다. 그러다 부인인 유카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말지만, 그녀는 뜻밖의 말을 건넨다. 남편과는 지금처럼 사귀어도 전혀 상관없다고, 부탁이니 이대로 남편이랑 관계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걸까. 불륜 상대에게 헤어져 달라가 아니라,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는 여자라니 어찌 된 일일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재회>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던 요코제키 다이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서사를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의 며느리로, 아내로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모습과 업무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지나게 되면 받게 되는 사회적 시선, 애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혹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자신의 소유처럼 대하는 남성들의 모습 등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데이트폭력, 가스라이팅, 결혼과 시집살이, 육아와 불륜... 대체 왜 여성들의 삶은 이리도 험난한 것인지 혀를 내두르게 되는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는 중심 인물인 마유미와 유카리 외에도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가독성을 높여 준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988년이지만, 2020년인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녀들의 서사가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대부분의 여성 독자들에게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작품일 것이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적인 부분에서도 매력적인 작품이고, 현실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