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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릴리스 폭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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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면 가끔 실소가 터져 나온다. 지붕을 타넘고 글록 권총으로 묘기를 부리는 CIA 요원들을 볼 때마다 말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면서 그런 추격전을 벌이다니. 정체가 발각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요원 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 CIA 요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걷고, 운전할 때는 노란불에 멈춰 서고, 오가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가 하품이 날 만큼 지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상대가 잠잠해지면 그때 슬그머니 빠져나가 007 임무를 개시하는 것이다.     p.8~9

 

이 책의 저자인 아마릴리스 폭스는 전 CIA 비밀요원이자 당시 최연소 여성 비밀요원이었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테러 발생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22살에 CIA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 후 가장 위험하지만 모두가 선망하던 최정예 비밀작전에 투입되어, 수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6개국의 테러집단을 추적했다. 이 책은 바로 그 CIA 최연소 여성 비밀요원의 영화보다 더 놀랍고 매혹적인 삶을 담고 있다.

 

 

아마릴리스 폭스는 중국 상하이부터 파키스탄 카라치까지 세계 곳곳에 잠입해 10년간 예술품 사업가라는 위장된 신분으로 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다국적기업에 컨설턴트로 취직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엄마를 포함한 가족, 친구들 모두가 그랬다. 그녀의 삶은 오직 테러를 막기 위한 포섭과 잠입, 협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새로운 위장 신분이 견고해질수록 그녀는 현실 세계가 점점 더 멀어져간다고 느낀다. CIA 요원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건 무기가 아니라 위장 신분이었고, 그들이 얻고자 하는 건 상대의 목숨이 아니라 신뢰였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CIA 요원들도 물론 있었고 말이다.

 

 

새로운 위장 신분이 견고해질수록, 현실은 거기에 가려졌고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나는 이 신분으로 첫 번째 여행을 다녀오고, 두 번째 여행까지 무사히 마쳤다. 처음에는 착륙 후에 세관에서 심문받을 게 두려워 비행 중에 세부 정보를 강박적으로 암기했다. 하지만 새 신발에 길이 드는 것처럼, 얼마 안 가 자연스러워졌다. 현실 세계는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앤서니와의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관련 서류는 뜯지도 않은 채 부엌 식탁에 방치되었다.     p.199~200

 

아주 평범했던 화요일 아침에 3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파괴적인 행위가 바로 테러이다. 그리고 아마릴리스 폭스는 바로 그러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삶을 사용한다. CIA 요원들은 자신들이 막아낸 재앙의 규모로,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평가한다. 수백 가지 재앙 속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인생은 어떤 걸까 궁금했다면 이 책이 그 답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알던 스파이, 혹은 CIA 요원들의 모습이란 영화 속에서 등장하며 어느 정도 과대 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 책 속에서 보여지는 CIA 요원의 삶은 매우 디테일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 놀라웠다. 워싱턴포스트가 "CIA 요원들의 회고록 중에서도 가장 디테일하고 풍성하다!"라고 평가했을 만큼 말이다. 반면  CIA에서는 지나친 정보 누설을 우려하며 끝까지 이 책의 출간을 막으려고 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이런 것까지 다 공개해도 되나 싶은 부분들이 꽤 있었다. 그만큼 그 어떤 영화나 첩보소설에서보다 리얼한, 진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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