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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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소년이었다. 입학식 때, 유사쿠를 빤히 보던 소년. 자기하고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그 인물에게 매력을 느낀 것도 아니고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 얼굴을 보면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유사쿠에게 그 소년은 그런 존재였다.    p.82~83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UR전산의 대표인 우류 나오아키가 암으로 투병하다 임종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들인 아키히코는 아버지의 사십구재 전에 그가 소장했던 대량의 장서와 미술품을 처분하기로 하고 사람들을 부른다. UR전산은 우류가와 친척인 스가이가 양쪽이 번갈아가며 실권을 잡아 왔지만, 장남인 아키히코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기에, 지금은 스가이 가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분위기였다. 우류 나오아키는 대부분의 재산을 아들인 아키히코에게 남겼기에, 남은 미술품들을 친척들에게 보여주고 나눠주기로 해 집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때, 현재 UR전산의 대표이사인 스가이 마사키요가 살해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게다가 흉기는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석궁이었다.

 

 

해당 사건을 조사하게 된 형사 와쿠라 유사쿠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묘한 경쟁 관계에 있었던 우류 아키히코와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공부를 잘했지만 유사쿠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언제나 학급의 리더였던 데 반해, 우류는 뛰어난 실력에 비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유사쿠는 우류와의 대결에서 공부든, 운동이든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살인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로 다시 만나게 된 그들은 대체 무슨 악연인지, 우류의 아내는 바로 유사코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 미사코였던 것이다. 오래 전 입시를 준비하던 당시 아버지가 쓰러지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지망하던 의대 대신 경찰의 길을 택했던 유사쿠는 당시 연인이었던 미사코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이별을 했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사코는 자신이 우류와 결혼하게 된 것부터 현재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운명의 ‘실’에 조종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과거와 현재의 살인 사건 수사가 함께 진행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녀석이 하는 일 하나하나가 묘하게 거슬렸어. 하지만 녀석을 잘 알기 전부터 나는 그 녀석을 의식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나. 어째서일까. 파장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 하여간 본능적으로 배척하려고 했어. 마치 자석의 S와 S, N과 N이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야."     p.184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3년 작으로 국내에는 2007년에 출간되었었다. 이번에 새로운 표지로 옷을 갈아 입고, 번역도 새롭게 다시 해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상징적으로 그려 넣은 표지도 인상적이고, 작품이 발표된 지 이십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군더더기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최근작도 물론 좋지만, 초기작들도 그에 못지 않은 완성도와 필력을 보여주고 있어 읽을 때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이야기는 한 대기업의 대표이사가 독화살로 살해되는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중심 플롯은 범인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라이벌이었던 두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한 여자의 운명 같은 드라마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관계가 시작하게 된 과거에 숨겨진 비밀이 다가갈 수록 뇌의학, 전두엽 절제수술 등 첨단 의학을 악용하려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3대에 걸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동안 과학과 의학의 최첨단 소재들을 자주 작품 속에서 다루어 왔는데, 이 작품에서는 비인간적인 인체 실험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과 이후에 나타나는 결과들을 통해 얽히고설킨 두 남자의 삶과 운명을 장대한 드라마로 그려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얼마나 끔찍한 무게일까. 날 때부터 타고난, 이미 정해져서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끊을 수 없는 운명으로 묶인 두 남자의 치열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매혹적인 드라마 속으로 떠나보자.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휴먼 미스터리' 분야에서 최고인지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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