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5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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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얘기하지 않은 일이 있어요." 해미시가 말했다. 그는 토미가 신도였던 것 같은 해돋이 교회를 찾아갔던 일부터 휴가를 내고 그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샌더스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왜 블레어 경감이 당신을 경찰의 제일가는 골칫거리라고 하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아니, 혹시 누가 당신을 알아보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런 위험 정도는 감수하는 거죠."     p.101

 

스코틀랜드 북부의 험준한 산자락에 자리한 평화롭고 한적한 로흐두 마을, 그저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이나 주워듣고 밀렵이나 하고 공짜 차나 얻어먹으며 살고 싶은 순경이 있다. 해미시는 그 날도 여기 농장에서 차 한잔, 저기 회반죽을 칠한 농가에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면서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이 마을에서 순찰은 단순한 사교 방문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흐두 인근 글레넌스테이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약 과다 투여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악의 소굴과도 같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 고지도 더 이상 마약 청정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미시는 약물 소지죄로 체포된 이력이 있던 그 청년을 직접 만났었고, 지금은 약물을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약물 과용으로 숨졌다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사망자의 유족이 사고사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고 그를 찾아 오자, 본부 몰래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해미시는 청년이 신도였던 것 같은 교회를 찾아갔다 수상스러운 정황을 발견하고, 휴가를 내고 신분을 감춘 채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위장 취업은 시작에 불과했고, 마약 밀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대책도 없이 허세를 떨다가 마약 카르텔 수뇌부를 만날 지경에 처하게 되는데, 뒤늦게 이 일을 보고받은 경찰 본부가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함정 수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일은 점점 커지게 된다. 그러다 졸지에 글래스고에서 파견 온 올리비아 체이터 경감과 부부로 위장해 거물 마약상 행세를 하게 되는데, 해미시의 예측 불허한 종횡무진 수사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왜 당신처럼 총명한 인재가 시골 마을 순경으로 썩고 있답니까?" 각자 술잔을 들고 자리에 앉자 배리가 입을 열었다.
해미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설명하기도 지겹군요. 나는 순경 일이 좋습니다. 로흐두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그러면 인생은 어쩝니까? 재미는 어디서 보고요?"
"한순간의 재미 따위, 인생의 행복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서요." 그가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p.195~196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그 열 다섯 번째 작품이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는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20세기 초 고전들의 유산을 계승한 정통 코지 미스터리이다. 1985년 <험담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4권의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작가인 M. C. 비턴이 작년 12월 말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시리즈는 34권으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사태평, 유유자적, 행방은 늘 ‘오리무중’인 로흐두 마을의 유일 공권력인, 야망 없는 시골 순경을 주인공으로 말이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천재적인 수사 실력과 비인간적인 외모의 경찰들은 사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유명한 시리즈 캐릭터들이 다 그렇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너무도 평범해서 고개를 돌리면 어느 거리에서나 만날 법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스토리라 그런지 어딘가 친근함으로 무장한 매력으로 중독성있는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서는 해미시가 난생처음으로 해외에 나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한층 더 스펙터클한 모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만의 특별한 점이 바로 '할리퀸 로맨스와 정통 문학 작품의 경계에 서 있다'는 건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전작까지는 야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남자와 상류사회의 우아한 여인이 만들어 내는 로맨스가 있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녀와 파혼한 이후 다시 솔로가 된 해미시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시리즈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가 설계되고 발전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캐릭터이길래, 무려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수십 년 전에 쓰였던 아늑한 고전 추리물이 현대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를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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