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가는 유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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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스스로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 좁고 허름한 집, 늘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옷, 둘이 나눠 쓰는 학용품, 게다가 게임도 스마트폰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 보면 기분이 암울해질 따름이다. 그런 생활이 기본이었던 우리에게 1년에 하루라고는 하나 남과는 다르게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정신적인 구원이었다.     p.38

 

쌍둥이 형제인 유가와 후가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그걸 방임하는 어머니 밑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에게 아무 이유 없이 걷어차이고, 얻어맞았고, 남편의 폭력에 기를 못 펴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형제가 선택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공유'였다.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만큼 혼자보다는 함께인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늘 함께 다녔고, 오로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에 서로가 있었던 장소가 서로 뒤바뀌는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갑작스레 찌릿찌릿 떨리고 막에 감싸인 듯한 감각이 밀려오면 그 자세 그대로 굳어서 바로 다른 장소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순간 이동은 1년에 단 하루, 그들의 생일에만 두 시간 간격으로 일어났다. 이 특별한 능력은 불운으로 점철된 우울한 형제의 일상에 작은 탈출구가 되어 준다.

 

그저 잠깐 동안의 이동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남들처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있던 유가와 후가 형제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어 주었다. 1년에 단 하루라도 남과는 다르게 특별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이들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구원'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생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이 특별한 순간 이동 능력을 이용해 왕따를 당하던 친구를 도와주고, 어른들에게 착취당하던 여자 친구를 구출하기도 하며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한들을 응징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나와 후가가 사회에서 엇나가지 않기 위해 익힌 지혜 중 하나에 따르기로 했다. 바로 '모르는 게 있으면 아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구하라'다. 그게 제일 손쉽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히 아는 것도 모른 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다. 유치원 때까지 저녁을 매일 먹는다는 것도 몰랐을 정도다.    p..164

 

겉모습은 똑같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유가와 후가는 성격도, 취향도 완전히 달랐다. 공부를 잘하는 형 유가는 과거와 미래만 신경 쓴다. 그에 비해 운동을 잘하는 동생 후가는 지금 이 순간만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후가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욱하는 터프한 성향이 있는데, 유가는 그런 동생의 앞날이 걱정되는 성향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 형제를 보고 어쩐지 '천사와 악마 같다'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렇게 얼굴은 같은데 완전히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라서, 이들이 순간 이동 능력을 통해 상대를 당황시키거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쁜 상황을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앞에 놓여진 현실이 바뀌는 일은 없다. 그들 역시 ‘세상에 슈퍼히어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소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서 고통 받는 약자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준다.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에는 그 어떤 위험하고 진지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유머가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닥친 그 상황과 상관 없어 보이는 무심한 유머를 툭툭 뱉어내며, 이야기는 가벼운 재미를 추구하는 것처럼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묵직한 여운을 남겨준다. 이 작품 역시 아동 학대와 왕따, 납치 및 살해, 청소년 범죄의 폐해 등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거운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들과는 다르지만, 이사카 고타로식 히어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색다른 유쾌함과 순수한 따뜻함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이사카 고타로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이 더 마음에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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