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 매일 흔들리지만 그래도
오리여인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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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위로만 쑥쑥 자라온 삶은 아니었다. 사람은 물론 일에서도 많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런 시간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나와 같은 상황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나 노하우도 생겼다. 쨍하게 햇빛이 들지 않는다고, 더 높이 자라지 못한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햇빛을 받고 쑥쑥 자란 나무는 사람에게 과일도 주고 그늘도 주는 인생이라 좋고, 질경이처럼 삶이 척박하여도 헤쳐나가다 보면 누군가에게 작은 좌표가 되는 삶도 좋다.    p.71

 

사랑스러운 그림과 따뜻한 글로 SNS상에서 15만 팔로워와 소통하고 있는 오리여인의 4년 만의 신작 에세이이다. 오리여인이라는 이름으로 4권의 책을 펴내며 5년이 넘게 한 번도 쉬지 않고 활동해왔다. 이런 저런 트러블도 있었고, 너무 소진되어버린 상태라 스스로 활동을 멈추게 된다.  그 동안 머릿속에 일, 오로지 일밖에 없던 그녀에게 하루,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자신만의 시간이 갑작스럽게 생기게 된 것이다. 처음 한 달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인터넷에 검색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모든 걸음을 멈추자 오히려 그녀의 일상이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쁘게 앞만 보며 달려가거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에서 숨가쁘게 뛰어다니느라 우리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것에 참 인색하다. 오리여인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보폭으로 걷는 삶을 그저 가만가만 보여준다. 땅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식물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더니 결국은 싹을 틔워내는 것처럼, 각자에게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식물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는 거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살면서 혼자만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에, 타인과의 비교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존심으로 만든 둑이었나 보다. 와르르 무너진 마음 사이로 열정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마음이 물에 젖은 한지같이 질척이고 무거워졌다.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먼지 같은 이야기에 마음 쓰지 말라며 밥이나 먹자 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고 같이 걷다 해방촌 계단에 앉았다. 달이 보인다. 한참을 친구와 이야기하니 푹푹 젖어 있던 마음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그래. 눅눅해진 내 마음, 시간을 들여 잘 말려주면 마른 한지처럼 더욱 질기고 단단해지겠지.    p.190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을 수록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을 피하게 되는 것 같다. 자수를 놓는 것처럼 한 땀 한 땀 마음을 천천히 눌러 담는 일, 정성으로 마음을 쏟아 요리를 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리여인이 들려주는 시간을 들여 마음을 다독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위로가 되어 주기도, 힐링이 되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일상 속 행복들이, 평범해 보이지만 따뜻한 순간들이, 당연한 것처럼 느끼며 살았지만 사실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아침에 먹는 따뜻한 밥, 친구가 힘내라고 보내주는 문자, 혼자서도 잘 자라고 있는 화분, 재미있게 읽은 책과 음악 등.. 당연한 것은 정말로 없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의 진짜 삶과 닮아 있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람 마음일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여도, 평화롭고 고요해 보여도, 걱정 없이 부유해 보여도 사실 그 안에 어떤 감정과 생각들로 마음이 채워져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사는 걸까. 이런 저런 마음들이 뒤엉켜 떠밀리듯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다들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건지 말이다. 오리여인은 말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보폭으로 걷는 삶이라는 것이 매일 불안하고, 망설이며, 주춤거리게 할지도 모르지만, 멈추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걸음 다시 내딛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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