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단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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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는 항상 배심원들을 '단죄의 신들'이라고 불렀는데, 기억하니?"
"그럼요. 그 사람들이 유죄 여부를 판단하니까요. 하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아저씨?"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우리를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단죄의 신들이 많다고. 거기에 몇 명 더 보탤 필요는 없지 않겠니?"   p.33

 

LA에서 유명한 속물이자 악당 전문 변호사인 미키 할러, 그는 지난 해에 스캔들과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인해 지방검찰청장 선거에서 패배했다. 간신히 변호해 석방시킨 의뢰인은 또 다시 음주운전으로 무고한 시민 두 사람을 죽였고, 그로 인해 딸 헤일리는 아빠와 인연을 끊다시피 멀어졌다. 당시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의뢰인을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석방시켰다고 언론에서 떠든 덕분에, 헤일리는 비난과 경멸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전학을 가야 했고, 그 의뢰인이 죽인 두 명의 피해자는 같은 반 친구와 엄마였던 것이다.  미키의 평판은 바닥이었고, 법정에 가서 건질 의뢰인이 있나 찾아봐야 할만큼 일거리가 없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살인사건 수임 의뢰가 들어온다.

 

의뢰인은 디지털 포주로 함께 일하던 콜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그였고, 두 사람은 돈 때문에 몸 싸움을 했었다. 그는 자신이 방을 나온 뒤 누군가 그녀를 살해한 게 분명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키 역시 포주라는 직업 때문에 일단 그를 의심의 눈으로 보지만, 살해당한 피해자가 자신을 추천했다는 이야기에 숨이 턱 막히고 만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미키를 찾아오던 단골 의뢰인이었다. 미키는 그녀에게 새 출발을 하라며 충분한 돈을 쥐여주고 비행기를 태워 보냈는데, 그렇게 변호인과 의뢰인 관계의 도를 넘기면서까지 신경 써서 챙겨주었던 의뢰인이었던 거다. 자, 이제 상황이 복잡해졌다. 예전 의뢰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의뢰인을 변호하게 되어 법적으로 이해관계의 충돌이 생긴다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녀에 대한 미키의 감정이 특별하다는 게 문제였고, 자신이 그 동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된 것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미키는 한때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에게 일어난 비극의 진상을 밝히기로 하는데, 과연 그는 현재의 의뢰인인 피의자와 과거의 의뢰인이었던 피해자를 동시에 구할 수 있을까.

 

 

"내 말 잘 들어라." 리걸이 말했다. "부당하게 기소된 피고인을 위해 맞서 싸워주는 것보다 더 숭고한 대의명분은 없다. 이 일을 망치지 마라, 미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아래로 푹 숙였다.
"죄책감을 견디면서 살아야 한다." 리걸이 말했다. "이제 그만 영령들을 보내줘라. 그러지 않으면 영령들이 너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을 거다. 그러면 넌 좋은 변호사가 못 되겠지.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될 테니까."    p.231

 

마이클 코넬리의 '미키 할러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작품이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탄환의 심판>, <파기환송>, <다섯 번째 증인>에 이은 <배심원단>은 '인간쓰레기들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미키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부분일 것이다. 수임료가 높은 살인사건 변호를 맡는다는 생각만으로 온몸에서 전율이 일어난다고 말할 만큼 돈을 좋아하는 미키이지만, 약쟁이나 살인범 같은 인간쓰레기들을 변호하는 일은 그만큼 뼈아픈 대가를 요구한다. 그의 의뢰인 명단에는 노인들을 표적으로 삼은 차량절도범과 데이트 성폭행범, 수학여행기금을 착복한 사기꾼 같은 다양한 범죄자를 비롯해서 성매매와 관련된 살인피의자까지 있었으니.. 딸이 자신과 인연을 끊겠다고 해도 아버지로서 반박할 만한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언제나 세상이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자신은 세상의 회색지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는 일과, 그 결과에 대한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경찰 스릴러인 해리 보슈 시리즈보다, 법정 스릴러인 미키 할러 시리즈를 더 좋아했는데, 장르적인 선호도보다는 캐릭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게 했던 작품이었다. 미키 할러는 정의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형사전문 변호사로 설정되어 있지만, 나쁜 의뢰인의 무혐의를 밝히는 과정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뭔가가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진면목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에 있다. 속물 변호사로서 승소율을 올리고 오로지 돈만 벌면 그만인가와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건지에 대한 정의 구현 문제에 대해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니 말이다. 다들 알다시피 미키와 이복 형제인 해리는 독립된 시리즈의 주인공이지만, 종종 함께 출연하기도 하고, 이번 작품처럼 까메오같은 느낌으로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해리 보슈 시리즈가 무려 스물 두 편, 미키 할러 시리즈가 여섯 편이나 쌓인 세월만큼 이제는 완전히 독립적인 캐릭터로 스스로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인물이 되었는데, 그래서 종종 이렇게 다른 작품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도 시리즈의 팬으로서 특별한 재미인 것 같다. 마이클 코넬리는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 외에도 기자인 잭 매커보이, FBI 특별 수사관 레이철 월링, FBI 프로파일러 테리 메케일렙 등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시리즈를 써왔고, 이들 역시 여러 시리즈에서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등장한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재미인 셈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The Gods of Guilt'로 극중 미키의 아버지가 항상 배심원들을 '단죄의 신들'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나온다. 법정에서 배심원단의 평결이 유죄 여부를 판단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신적인 권위를 갖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단죄의 신들은 미키의 마음속에도 악령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극중에서 미키는 그 죄책감을 극복하기 이해 더욱 열심히 변론에 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서 함께하는 목소리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상처 준 사람들, 나를 축복하고,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사람들, 내 단죄의 신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개인적으로는 그 동안 읽어온 미키 할러 시리즈 중에서도 재미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시리즈물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시리즈 첫 작품부터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바로 이 작품부터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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