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아득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이라는, 각각의 가짜 현실은 NSC 전함 선원들을 망쳐놓는다. 그 가짜 현실을 토대로 쌓인 믿음이, 그 모래성과도 같은 믿음이 선원들이 진짜 현실에서 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아득한 시간을 목격한 선원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어쩌면 영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겁먹었다. 또한, 아득한 공간을 목격한 선원들은 대체로 의기소침한 상태로 돌아왔다. 우주의 광대함에 주눅이 들고 만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친들 우주에 견주어 보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p.219~220

 

일가족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사망자는 세 명, 실종된 여성이 한 명, 용의자는 해군우주사령부 소속 대원 패트릭 머설트로 공식적인 기록 상으로는 전투 중에 실종된 것으로 되어있는 인물이었다. 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연을 끊고 살아가던 선원이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을 수사하게 된 FBI는 '시간 여행 관련 범죄'를 전담하는 NCIS(해군범죄수사국) 특별수사관인 새넌 모스에게 연락한다. 용의자가 미래를 조사하던 전함의 선원으로, 당시 그가 탔던 전함 자체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모스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미래 세계로 간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면 현재 수사가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은 역사가 되었을 테고, 운이 좋다면 머설트네 가족을 살해한 범인도 잡혔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단순히 미래 세계에 도착해서 모든 질문의 답이 적힌 서류를 건네받고 오는 걸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극비리에 운영되고 있는 해군우주사령부는 '아득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탐험하고 있었다. NCIS 수사관이 여행하는 미래 세계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이라 명명되어 IFT라 불린다. '인정되지 않는'이라 함은 그들이 목격하는 미래 세계란 현재 조건에 기인하는 가능세계로, 사실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간 여행자들이 도착하는 미래 세계는 여행자가 존재할 때만 존재하는, 여행자가 현재 세계로 돌아갈 경우 ‘사라지는’ 세계이다. 양자역학의 다중우주 해석론을 토대로 구축되어 있는 이 작품의 세계관은 대단히 매혹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시간 여행자가 겪게 되는 미래 세계가 다시 돌아가면 존재하지 않을 세계라고 해서,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마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모든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 자신이 실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는 거네. 자신이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렇게 믿지.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고 말하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진짜라고 떠들어대는 걱야. 하지만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야. 우리는 그저 환상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뿐이야.     p.446

 

수사관들이 19년을 건너뛰려면 양자거품 속을 석 달간 여행하게 된다. 각각의 웜홀은 별개의 미래 세계로 향하는 다중우주로 이어지는 터널이었고, 그 중 하나의 웜홈을 항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동안, 현재의 현실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동안 미래 세계를 일곱 차례나 여행해 온 모스의 몸은 계속해서 나이를 먹었기에, 실제 출생연도와 상관없이 생물학적인 나이는 어머니와 몇 년 차이 나지 않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 여동생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미래 세계에서 보낸 세월이 몸에 고스란히 새겨지기 때문에 IFT 여행은 몸에 무리를 주었고, 모스는 지난번 여행을 다녀와서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소중한 관계까지 잃고 말았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는 SF 장르의 작품은 많지만, 이 작품은 대단히 특별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주인공인 여성 수사관 캐릭터를 유능하지만 다리 절단 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정하고 있어, '장애인'과 '여성'이라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작가인 톰 스웨터리치는 장애인 전용 도서관에서 12년 간 일하면서 그들의 삶과 애환을 겪어온 이력이 있다. 덕분에 섀넌 모스라는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구축하며, 수사관으로서, 시간 여행자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디테일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시간 여행자로서 겪게 되는 실질적인 고민들과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적들과 맞서 싸워 무고한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수사관으로서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섀넌 모스라는 캐릭터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시간 여행과 다중 우주에 관한 아이러니를 눈부신 통찰로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살인 사건 수사라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로 시작해서 SF 장르를 다소 어렵게 느끼는 독자들의 벽도 없애 주었고, 그것이 세계 종말로 연결되는 묵직한 SF 장르로 이어지고 있어 하드 SF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기대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동안 읽었던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손꼽히는 수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