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의 일을 냅니다 - 사장이 열 명인 을지로 와인 바 '십분의일'의 유쾌한 업무 일지
이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멤버들은 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문제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속 좁고 이기적이고 지갑에서 만원도 꺼내기 싫어하는 좀팽이인데 그릇이 큰 사람들을 좇아가며 좋은 사람 흉내를 내려니 숨이 가빴다. 그래도 함께 가고 싶어 열심히 좋은 사람을 연기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모였는데 피곤하게 규칙이 무슨 필요람. 채찍은 악당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p.72

 

을지로의 으슥한 인쇄소 골목이 힙스터들의 성지로 변했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빛바랜 건물. 인쇄용지를 한가득 싣고 아슬아슬 질주하는 삼륜차.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거리. 낙후된 인쇄골목에서 '힙플레이스'로 완벽히 변신한 그곳엔 점심, 저녁 시간이면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로 득실거리는 장소가 되었다. 을지로 골목에 자리 잡은 가게들을 보면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인테리어 혹은 빈티지한 느낌을 그대로 살리거나, 복고 감성으로 충만한 곳들이 많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간판 없이 가게를 차리는 경우도 많아서, 지도 앱을 이용하더라도 가게를 눈앞에 두고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을지로 인쇄 골목에 위치한 와인 바, 십분의일도 역시 그렇다.

 

독특한 컨셉으로 무장한 가게가 넘쳐나는 을지로에서도 와인 바 십분의 일은 조금 더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사장이 열 명이라는 것. 10명이 모여 월급의 10%씩 내서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와인 바의 업무 일지이자, 평범했던 회사원이 퇴사 후에 가게를 준비하고, 오픈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드라마 같은 에세이이다. 저자는 드라마 제작사에서 피디로 일하며 살인 적인 스케줄에 시달려 남몰래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벌에 쏘이는 바람에 밤 9시에 조기(?) 퇴근을 하며 이렇게 일하느니 차라리 병원에 드러눕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교통사고가 나고 만다. 그리고 그걸 계기로 결국 사표를 내게 되는데, 퇴사 후에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들과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들과 함께 와인 바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십분의일이라는 공간도 공동 작업으로 탄생했다. 의견이 안 맞아 다툴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같이 웃고 떠들고, 참 재밌었다. 그런데... 막상 가게를 오픈하고 보니 이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 나 혼자였다. 가상의 공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카톡방 안에서는 모두 옹기종기 모여서 떠들고 있었지만, 진짜 십분의일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었다. 혼자 불을 켜고 오픈 준비를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음식을 만들고 혼자 밥을 먹고... 어느새 나는 그렇게 혼자가 됐다.     p.248

 

십분의일은 '청년아로파'라는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남태평양의 아누타 섬에 살고 있는 한 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 그걸 감명 깊게 보고 만들었던 모임이었다. 부족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사랑, 협동, 공생 등을 모두 아우른 단어가 바로 '아로파'였던 것이다. "우리 아누타 섬처럼 다 같이 버는데 수익은 똑같이 나누는 마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마을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돈에 구 결국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농담처럼 시작한 일이 가게 창업이라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말았다. 이 책은 술자리에 시작되었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공동체를 만들자는 거창한 비전이 있었던 작은 모임이 어쩌다 보니 을지로에서 핫한 와인 바를 만들게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임대 계약도 순조롭지 않았고, 돈이 없어 인테리어도 반셀프로 하고, 무작정 덤빈 탓에 고생도 숱하게 했지만, 결국 근사한 와인 바가 탄생했다. 무슨 일이든 '혼자' 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함께'여서 가능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다르게 내고, 다 함께 벌어, 똑같이 나눈다'는 참신한 방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흥미롭고, '월급 받는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풀어낸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부분들은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일 것이다. 난 회사원 체질이 아니라며 회사를 때려 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는 것 말이다. 오늘도 퇴사를 고민하는 세상의 모든 직장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