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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숭이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평점 :
현실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끝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모두들 마지막에는 항상 같은 기대를 품더군. 문 쪽을 힐끔거리며 구원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더란 말이지. 하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아. 현실에 존재하는 구원자는 자기 자신뿐이야. p.292
포터는 지난 5년 동안 4MK 전담반을 이끌고 연쇄살인범을 쫓아 왔다. 4MK, 일명 네 마리 원숭이 킬러라 부르는 그는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았고, 한 명당 상자 세 개에 각각 희생자의 귀, 눈, 혀를 담아 가족에게 보냈다. 지난 5년 동안 스물한 개의 상자가 쌓였고 젊은 여성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경찰은 단 하나의 단서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에 치여 얼굴이 뭉개진 신원불명의 사망자가 검은 리본이 묶인 작고 하얀 상자를 가진 채로 발견된다. 4MK로 추정되는 인물은 현장에서 즉사했지만 상자 속에는 한쪽 귀가 담겨 있었고, 이는 어딘가에 아직 그의 마지막 피해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범인이 죽었으니 연쇄살인은 끝이 났고, 이제 4MK 전담반은 그가 남긴 마지막 피해자를 찾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네 마리 원숭이'라는 이름은 일본 닛코의 도쇼구 신사에서 유래했다. 신사 입구 위에 원숭이상 세 개가 있었는데, 각각 귀와 눈과 입을 가리고 "악을 듣지 말고, 보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뜻을 품고 있었다. 네 번째 원숭이는 "악을 행하지 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4MK는 희생자의 손에 "악을 행하지 말라"는 쪽지를 남겼다. 그가 저지르는 범죄의 패턴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가까운 사람,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아끼는 사람을 납치해 범행을 저질렀다. 마치 악을 벌하는 자경단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경찰은 희생자가 발견되고 나서야, 희생자의 주변을 조사해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이번에 4MK가 상자를 배달하려던 주소는 부동산 재벌 아서 탤벗의 집이었고, 사라진 것은 숨겨진 딸 에머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당신을 그 남자와 같은 방에 가두고, 당신이 뭘 하든 아무 후환이 없으리라 확신하게 해준다면? 그래도 그 남자를 해치지 않을 건가요? 미간에 총알을 박지 않을 거예요? 칼을 쥐고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단칼에 긋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을 건가요?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샘.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인 거예요."
"하지만 그 생각에 휘둘려 행동하지는 않지."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덕분에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됐죠." p.515
이 작품은 4MK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J. D. 바커는 이 시리즈를 이후에 두 권 더 썼다. 보통은 이런 스릴러 장르의 시리즈가 이어질 때 주인공인 형사나 FBI요원이나 범죄 심리학자 등 범인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의 이름을 따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형사인 '샘 포터' 시리즈가 아니라 연쇄살인범인 '4MK' 시리즈라고 이름 붙였을까. 게다가 이야기는 4MK가 교통사고로 죽는 걸로 시작된다. 범인이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에, 경찰은 그가 남긴 일기장과 최소한의 단서만으로 아직 살아 있는 마지막 피해자를 찾아야 한다. 이야기는 4MK의 흔적을 쫓아 피해자를 찾는 경찰들의 현재 시점과 4MK가 마치 자서전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아둔 일기장의 과거 시점이 교차 진행된다. 이런 구성일 때 현재와 과거가 비슷한 무게를 지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과거의 서사가 현재의 그것에 보조하는 플롯으로서의 역할을 하거나 액자 구성으로 독자들이 객관적인 거리감을 느끼도록 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내용이 주는 충격과 공포 면에서나, 분량 면에서나 모두 형사의 시점보다 범인의 시점이 더 스릴 넘치고, 긴장감과 속도감이 있다. 이 시리즈가 왜 '샘 포터' 시리즈가 아니라 '4MK' 시리즈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포터 형사를 비롯해서 경찰들의 존재감도 좀 약한 편이고, 살아있는 피해자를 구하려는 과정을 그린 서사 또한 스릴이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목적은 기존의 스릴러들과는 다르게 범인을 찾고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살인을 전시해온 범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작품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문장의 행간을 읽는 법을 익혀야 한다. 세상에 무고한 사람 같은 건 없으니까. 아마도 이 작품에서 이해되지 않았던 범인의 행동이나,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 요소들이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점차 완성될 거라고 생각한다. 역대 연쇄살인범의 부모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캐릭터인 4MK의 '어머니'가 다시 등장해야 그의 범행과 행동들의 많은 부분들이 설명될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