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익스체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2
최정화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이 널 어떻게 대하든 간에, 넌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야. 그걸 잊지 말렴."
그때는 삼촌이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삼촌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말을 잊고 싶어졌다. 이 모든 기억을 잊는 게 꼭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는 질문이 솟기 시작했다. 난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한순간이라도 편안해지고 싶었다. 물론 그 편안함이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잊는 건, 눈뜬장님과 같은 상태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쉽사리 메모린에 지원하지는 못했다.    p.38~39

 

집집마다 외벽에 오염물질 차단제를 발라야 하고, 공기정화장치가 장착된 헬맷을 쓰지 않으면 외출초자 할 수 없게 된 지구는 이미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팔아 티켓을 구입했고, 기회만 된다면 망설임 없이 지구를 떠났다. 도착하게 될 곳이 어딘지 알아보지도 않고, 왜냐하면 그게 유일한 생존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오게 된 니키와 가족들이 그곳에 도착하고 화성으로 이주하기로 한 것이 큰 실수라는 걸 깨닫는 걸로 시작된다. 화성에서는 아이디얼 카드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들은 그 카드에 대해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비행선 티켓을 사는 데 전 재산을 다 써버렸고, 한 달치 숙박료를 미리 지불했지만, 마중 나오겠다던 업자는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된 처지의 지구인들 150여 명에게 다섯 개의 공간이 지급되었고, 그들은 비좁은 출입국 수용소에서 주기적으로 '메모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듣게 된다.

 

'메모리 익스체인지'란 갈 곳이 없어져버린 이민자들에게 경제 사정이 어려운 화성의 파산자들이 아이디얼 카드를 팔고, 서로의 기억을 교환하는 것을 말했다. 아이디얼 메모리를 판매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보를 완전히 상대에게 넘기고 기억을 말소시킨다는 의미였고, 그렇게 '제로화'된 화성인들은 특수 구역에 격리되어 일반 구역 사람들과는 단절된 채 살아 갔다. 그리고 화성인과 기억을 교환한 지구인은 자신이 지구인이었다는 기억을 잃은 채 화성 사회에서 화성인인 것처럼 살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 있는 이민자들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계속 출입국 수용소에서 살던가, 메모린에 지원해 화성인으로 살아가던가 선택해야 했다. 이주민의 기억을 받은 화성인은 자신이 이주민이라 믿으면서 감시와 통제 아래 남은 삶을 살아가고, 화성인의 기억을 갖게 된 이주민은 자신이 화성인이라 믿으며 화성 사회에 편입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지구인의 기억을 갖고 감옥 같은 곳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는 것과, 그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화성인으로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 중에 어떤 삶이 더 행복한 것일까.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 것일까.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내가 보기에, 불필요한 것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고 결국은 그걸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지가 매우 강하고, 그 점에서는 우리 화성인들보다 뛰어났어요. 하지만 자기가 뭘 원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사고는 복잡했지만 단순한 진리들에는 취약했고 심지어 그것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가까운 길을 놔둔 채 아주 멀리, 마치 일부러 그것에 도착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우회하고 있었습니다.    p.6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스물두 번째 작품이다. 최정화 작가의 이번 신작은 2019년 「현대문학」 6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것이다. 핀 시리즈를 그 동안 읽어 오면서 SF 장르를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기대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파멸 직전의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이주한 소녀가 '기억 교환'을 통해 화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전작 <흰 도시 이야기>에서 전염병에 휩싸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네가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는 문장을 통해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인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실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장에서 화성에 도착한 지구인 니키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2장에서 니키와 기억을 교환하고 수용소에 갇힌 채 살아가는 반다의 시점으로, 그리고 3장에서는 메모리 익스체인지사에서 체인저로 일하는 도라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일 중독자로 사람들의 기억을 바꿔주는 일을 5년째 하고 있는 도라는 사실 반다의 기억을 이식 받은 니키였다. 반다는 전파 오류 사고로 수용소를 탈출해, 자신과 기억을 맞바꾼 니키를 찾아가게 된다.

 

"내 기억을, 그러니까 내 기억을 가져간 다른 이에게 그가 내게 넘겨주었던 기억을 돌려주고 싶어요. 그걸 그에게 주고 싶습니다. 난 그자가 내 기억을 가지고 자신을 잊은 채 살기를 바라지 않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당신 기억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게 이식된 서로의 기억을 들려준다. 반다는 자신에게 이식된 니키의 기억을, 니키는 자신에게 이식된 반다의 유년 기억을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자유롭고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살고 있는 건지, 우리는 모두가 자유롭고 존중 받는 세상을 위해 타인을 대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