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양 사나이 협회에서는" 하고 입을 열면서 사내는 가슴 지퍼를 조금 내려 선풍기 바람을 안에 넣었다. "해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양
사나이 한 명을 뽑아, 성 양 어르신님을 추모하는 음악을 의뢰해 크리스마스에 공연해왔습니다만, 올해는 경사스럽게도 당신이 뽑혔습니다."
p.5
여름용 양털 옷 속에서 땀을 흠뻑 흘리며, 양 사나이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넉 달 반이나 남았던 여름이었다. 하지만 9월이 지나고,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다 가도록 양 사나이는 좀처럼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는 낮에 도넛 가게에서 일하느라 작곡에 전념할 시간이 얼마 안 되었는데, 그나마 집에 와서 낡아빠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일층에 사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쫓아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양 사나이는 크리스마스가 나흘 뒤로 닥쳤는데도, 약속한 음악을 한 소절도 만들지 못했다. 그가 풀 죽은 얼굴로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도넛을 먹을 때, 마침 앞을 지나가던 양 박사가 그를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저녁 6시에 우리 집으로 오게. 좋은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 그런데 그 시나몬 도넛, 내가 먹어도 될까?"
양 사나이는 시나몬 도넛 여섯 개를 챙겨 들고 양 박사 집을 찾아 간다. 그 집은 현관 초인종도, 문기둥도, 바닥돌도 모조리 양이었고,
정원수도 한 그루 한 그루 양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양 박사는 양 사나이에게 말한다. 작곡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주에 걸린 탓이라고.
"자네 혹시...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구멍 뚫린 음식을 먹지 않았나?"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구멍 뚫린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옛날 옛적부터 내려오는 금기 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양 사나이는 촛불을 들고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구멍은 캄캄하고 구불구불한 굴로 이어져 있었다.
"나 원, 작년 12월
24일에 도넛 좀 먹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양 사나이는 혼잣말을 꿍얼거렸다. p.40
자, 과연 양 사나이는 과연 구멍 뚫린 도넛을 먹은 저주를 풀고 약속한 음악을 만들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미공개 단편 소설에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이 그림을 그린 아트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후와후와》《장수 고양이의 비밀》등 다수의 책에서 일본의 안자이 미즈마루와 파트너십을 보여 줬었고, 《버스데이 걸》《잠》
등의 작품에서는 독일의 카트 멘시크와 함께 했었다. 그가 한국의 일러스트 작가와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 자유분방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캐릭터 묘사가 돋보이는 40여 컷의 그림을 이우일이 완성하고, 거기에 구멍 뚫린 도넛 모양의 입체적인 북디자인이 더해졌다.
하루키의 소년 같은 엉뚱한 상상력도 동화처럼 읽혀서 좋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한 이야기라 겨울에 읽기에는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양 사나이와 양 박사, 그리고 꽈배기 도넛 모양의 꼬불탱이와 쌍둥이 소녀, 바다까마귀 부인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하루키의 이야기
속 인물들과 어찌나 찰떡 궁합인지... 이우일과 하루키의 조합은 완벽하게 느껴진다.
그들만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이루어지기까지, 짧다고 하면 짧지만 나름 다양한 모험을 거쳐왔던 이들이라 버라이어티한 이야기였다.
자, 하루키와 이우일의 완벽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나 보자.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당신의 세계가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