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척 상황이라.....'
내가 하는 일이 대체 뭔가, 라고 세라는 생각했다. 사람 하나가 죽었는데 그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면서
무슨 교통과 사고 담당자인가.
하지만 그런 불만을 후쿠자와에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사고 이후로도 몇 건의 인신사고가
일어났고, 마치 교사가 시험 채점을 하듯이 서류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p.86
늦은 밤, 한산한 도로에서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치고 옆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맞은편 차선에서 달려오다 충돌한 승용차 운전자는
손목에 붕대를 감는 정도의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트럭 운전자는 사망하고 만다. 이상한 건 트럭 운전자가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도 없는 무사고
운전자였으며, 동료들이 그의 운전이 너무 점잖다고 놀릴 정도였다는 거였다. 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은 트럭이 뭔가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꺾다가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치고 넘어간 것 같다는 판단에 목격자를 만난다. 사망한 운전자의 아내인 아야코가 담당 경찰인
세라와 동창이라 그들은 함께 의심되는 노상 주차 운전자를 찾아 내지만, 안타깝게도 법적으로는 운전자의 과실을 증명할 수가 없다. '법규는 아주
살짝 어긋나는 것만으로도 적이 되기도 하고 한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을 지켜 줘야 할 그것이 반대로 사람들을, 그것도 피해자를 공격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야코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 선을 넘어가 보기로 한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교통경찰'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양날의
검 같은 교통 법규에 저항하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중앙분리대'를 비롯해서, 시각장애인 소녀의 기적 같은 청각이 밝혀낸 교통사고의
전말을 담고 있는 '천사의 귀', 앞서가는 초보운전 차를 재미로 위협한 뒤차 운전자에게 닥친 후폭풍을 보여주는 '위험한 초보운전' 등 누구나
일상에서 겪을 법한 교통 법규 위반이라는 범죄를 매력적인 미스터리로 재탄생시킨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계산대로 진행되었다. 유일한 오산은 유지의 차가 아직 굴러떨어지지 않고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죽이고 싶다고 했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고......."
"시끄러, 조용히 좀 하라고."
핸들을 쥔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p.185
프리 카메라맨인 후카자와는 마치코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핸들을 잡은 후카자와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마치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앞차에서 뭔가 날아온 것 같다고 생각한 직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눈이 아프다는
마치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급하게 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다. 원인은 조수석 쪽의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빈 커피
캔이었다. 그들이 마신 것이 아니었으니, 달리던 앞차에서 타고 있던 누군가 던진 게 분명했다. 후카자와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요즘 빈 캔을 창 밖으로 던지는 무개념한 사람들이 많은데, 상대 차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운 데다, 설령 찾아내더라도 자기는 빈 캔
같은 건 버린 적이 없다고 잡아떼면 어쩔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실한 사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경찰의 입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느닷없는 부상을 당한 입장에서는 그저 운이 나빴다 치고 넘어가긴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랑의 힘이 불러온 의도치 않은 응징을 보여주는 '버리지 말아줘'는 두 커플의 이야기가 별개로 진행되다가 복수 아닌 복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과응보를 보여주며 통쾌함을 느끼게 해 준 이야기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치밀한 트릭과 반전이 매 작품마다 포진하고 있어, 발표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잘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여에 걸쳐 문예지에 실었던 것을 1992년에 한 권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국내에는 2010년에 출간되었었고,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롭게 번역해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더욱 공감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교통사고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에 익숙해지면 교통법규를 무시하거나, 도로에서 다른 차와 경쟁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사소한 일탈과
부주의함이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