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여보." 윌라가 말했다.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면 안 돼요? 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거 같아요......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칼리와 셰릴과 에어플레인이 유리창에 코를 바짝 대고 내가 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건 당신도 이해할 수 있겠죠!" p.132
1967년, 열한 살 윌라 드레이크는 초등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아빠와 동생 일레인만 있었고,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엄마는 아빠와 자주 다투었고, 감정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윌라는 아빠가 해준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엄마 대신 일레인에게 책을 읽어 주고는 침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엄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1977년, 스물 한 살
윌라는 남자친구 데릭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러 온다. 데릭은 윌라와 당장 결혼을 하고 싶어 하고, 윌라는 아직 졸업 전이고 내년에 들을 계획이었던
언어 인류학 과정을 듣고 싶다. 윌라의 엄마는 곧 직장 생활을 하게 된 남자 친구의 스케줄에 맞춰 갑작스레 결혼을 하겠다는 말에 데릭이 배려가
없다며 반대하지만, 윌라는 데릭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1997년, 데릭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윌라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들 문제로 가벼운
말다툼 중이었고, 데릭은 왼쪽 차선에 가고 있는 운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데릭은 그 차 앞으로 바짝 붙여 끼어들었고, 그러나 고속도로
갓길을 들이받는 사고가 나고 만다. 장례식 계획을 세워놓기엔 턱없이 젊은 나이였던 마흔세 살의 데릭을 잃고, 윌라는 미망인이 된다. 2017년,
예순 한살이 된 윌라에게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온다. 다짜고짜 자신은 드니즈의 이웃인데 윌라의 며느리가 총에 맞아서 자신이 어린
딸을 데리고 있는데, 자신은 출근해야 해서 더 이상 아이를 챙길 수 없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하지만 윌라의 두 아들은 아직 결혼 전이라
그녀에게 며느리뿐만 아니라 손주도 없었다. 알고 보니 드니즈는 아들인 션이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친구였고, 우연찮게 그녀의 집에 션의 어머니
연락처가 있었다는 거다. 윌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젊은 여자와 그녀의 아홉 살 난 딸, 그리고 강아지
에어플레인을 돌보기 위해 볼티모어로 날아가기로 한다.
만약 윌라가 클락 댄스를 만든다면 세 소녀가 보여준 춤과는 다른 춤일 거라고 생각했다. 윌라의 춤에는 한 여자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해 무대
오른쪽 끝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 눈에는 오로지 빠르게 도는 흐릿한 색깔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
'펑!' 무대 끝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진다. p.334
윌라 드레이크의 인생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중요한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초등학생일 때 갑자기 엄마가 사라진 상황에 대처해야
했고, 여대생이었을 때 남자친구의 청혼을 받고 고민했고, 사고로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찾아가야 했고, 그리고 손주를 품에 안은
할머니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손주처럼 어린 소녀를 돌보게 된다. 어쩌면 그때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지도 모를 그런 순간들이다. 노년의 윌라가 마지막에 얻게 된 특별한 기회는 그녀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의 삶을 시기 별로 일대기처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앤 타일러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시종일관 보여지는 작품이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구나의 삶처럼 평범해 보이는 풍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윌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마의 가출도, 남자친구의 프로포즈도,
남편의 교통사고도 모두 상대가 그녀를 배려하지 못해서 벌어진 상황들이기도 하다. 특히나 언어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이 결혼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던 점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 와 닿았던 사연이었다. 결혼 대신 선택한 것은 언어학자가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선생님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의 많은 여성들이 결혼이나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면서도 그때 놓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을 보상받지 못한다. 그래서 노년의 윌라가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 보고, 인생의 두 번째 기회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순간이 너무도
뭉클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