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고, 식사가 끝나자 빅토리아 소사이어티를 나섰다.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자 다시 할렘에 와 있었다. 사흘 뒤면 토미는 로버트 수댐의 저택을 방문하게 될 터였다. 이제 그 방문이 다른 우주로 건너가는 여행처럼 여겨졌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들이 그렇게 멀리 가 버리려고 하니까.    p.47

 

할렘에 있는 다세대주택에서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찰스 토머스 테스터, 항상 기타 케이스를 들고 다니는 그를 길거리에서는 '토미'라고 불렀다. 사실 기타 연주자 토미에게 음악적인 재능은 없었다. 스무 살의 실력 없는 연주자였기에 연주보다는 도시 구석구석을 돌며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토미는 특별 의뢰를 받고 온통 백인들로 둘러싸인 퀸스로 가서 작은 노란 책을 배달하고 200달러를 받는다. 그 돈이면 여섯 달 치 집세와 공과금, 식비 등을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미에게 로버트 수댐이라는 부유한 노인이 다가온다. 그는 사흘 뒤 레드 훅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 생각인데, 와서 연주를 해주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계약금으로 100달러를 건네준다.

 

토미는 안전한 할렘을 벗어나 망토처럼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거쳐 특정할 수 없는 세월의 공팡내가 배어 있는 수댐의 집으로 간다. 내일 밤 파티를 위해 연주를 하는 토미에게 수댐은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어느 무시무시한 전설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는다며, 토미를 고용한 이유는 그가 환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대양의 해저에는 왕이 잠들어 계시고, 잠든 왕이 귀환하게 되면 인류의 어리석음을 싹 쓸어 버릴 거라고. 그러면 흑인, 혼혈인 들의 차별에 대한 비참함이 끝날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려 수면이 일렁이는 느낌을 보여주고, 대양이 출렁이고 솟구치는 심해의 광경을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 그렇게 토미는 이상한 경험을 하며 수댐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오며 이제 할렘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후한 보수 때문에 수댐의 집을 다시 찾게 된다. 그날 밤, 파티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토미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나는 가슴속에 지옥을 품고 다녔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해 버린 다음 앉아 파괴된 모습을 즐기고 싶었지."
"그럼 넌 괴물이야."
"너희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괴물이지."     p.159

 

이 작품의 서두에는 '엇갈리는 심경으로 H.P. 러브크래프트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있다. 빅터 라발은 공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문제작 <레드 훅의 공포>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해서 이 놀라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로 대표되는 독특한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여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인종차별주의자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은 단편 <레드 훅의 공포>를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빅터 라발이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독립적이고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레드 훅의 공포>는 말론이라는 백인 형사가 이민자들이 부글거리는 동네에서 사건을 수사하다가 고대 종교의 의식을 목격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도 '지저분한 혼혈인들'이라든지 '죄악으로 물든 가무잡잡한 얼굴들', 또는 '아시아의 원숭이들'이라는 식으로인종차별적인 묘사가 난무한다. 빅터 라발은 <블랙 톰의 발라드>를 흑인 주인공 토미를 중심으로 다시 쓰는 방법을 통해 러브크래프트에 도전하고 있다. 극중 토미에게 접근해 연주를 부탁한 로버트 수댐과 토미를 미행하고 위협했던 말론 형사는 <레드 훅의 공포>에 등장했던 주요 캐릭터들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올해 초에 출간된 <엿보는 자들의 밤>이라는 작품으로 빅터 라발을 처음 만났는데, 그의 매력에 푹 빠져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터라 이번 작품은 굉장히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러브크래프트를 읽었든, 혹은 읽지 않았든 지 간에 <블랙 톰의 발라드>는 대단히 매혹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문화와 밀교에 비상한 관심을 품고 있는 노학자,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 초월적인 공포를 마주하게 되는 형사와 수댐에게 이끌려 악마 소환 의식을 돕게 되는 흑인 청년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준다. 사실 피가 난무하는 공포보다 이런 식으로 기괴하고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계속 잔상으로 무서움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공포와 환상이란 것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민자가 몰려들던 1920년대 뉴욕에서 무장 경찰과 마법이 혼재하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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