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헌터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난 죽을 수 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였다.

숨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산송장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뭐가 이토록 두려운 거지?    p.76~77

레미는 36년을 살아오면서 그 중 4년 동안 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도 한때는 성공한 남편이자 사랑하는 딸의 자상한 아빠, 중소기업의 전도유망한 기술자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그는 딱 한 번, 사장의 아내와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사장은 그 사실을 조용히 덮어주는 대가로 자진 퇴사를 요청했고, 아내는 이혼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그를 외면 했다. 구직 활동도 여의치 않았고, 기댈 형제도 없었던 터라 그렇게 노숙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벤츠에 타고 있는 남자를 공격하는 괴한 둘을 목격하게 되고, 남자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레미에게 값비싼 저녁을 대접한다. 게다가 안 그래도 직원을 고용할 참이었다며 그에게 보답으로 일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넉넉한 월급에 성에서 숙식까지 제공되는 일자리는 사실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정원사가 아니라 인간사냥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었다.

사진작가인 디안은 세벤트 산맥의 외진 숲으로 업무 차 출장을 오게 된다. 그곳에 도착해 장엄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적막과 무한대로 펼쳐진 것만 같은 거대한 공산 속의 생생한 색감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뒤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왔던 그녀에게 일은 도피처이자 살아갈 이유이고,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식사를 하러 들어간 산장에서는 남자들이 인근에 위치한 숲 속에서 젊은 여성이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미제 사건이라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갈 때는 각별히 조심하라는 얘길 들었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촬영을 하던 중에 산장에서 만난 남자들이 한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목격자를 없애기 위한 그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계획적인 살인이지만 살해 동기는 어디에도 없는 그런 범죄.

정말로 살해 동기가 없었을까?

있다면 딱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쾌락. 그 짜릿한 느낌.

조만간 또 다시 나설 것이다.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추는 순간, 자신이 죽을 것만 같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금단현상으로.    p.191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은 돈을 아주 많이 지불하고 전세계에서 온 부유한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는 절대 죽일 수 없는 사냥감, 한 번도 사냥해본 적 없는 사냥감을 찾던 이들은 노숙자, 불법체류 외국인 등 세상에서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 게임을 시작한다. 네 명의 사냥감, 그리고 네 명의 사냥꾼, 이들은 각자 목표물을 고르고 숲을 향해 도망가는 사냥감들을 추적한다. 그저 총을 난사해 사냥감을 학살하고, 살육을 즐기기 위해 거액의 참가비를 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들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우발적인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목격자를 쫓는 마을의 남자들 역시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사실 인간사냥에 참여하는 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이 작품은 노숙자 레인과 사냥감으로 선정된 세 명과 사진작가 디안의 시점으로 각각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교차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이다. 대부분 페이지 수가 많아 두툼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 중에서도 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만큼 군더더기 없고, 빠른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쫓기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공포와 서스펜스를 체감하게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든다. 기존에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들을 대부분 읽어 보았는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보여주는 그녀의 단편도 괜찮았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적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복잡다단한 심리변화를 포착해내는 장편도 탁월했다. 사이코 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코 헌터는 무자비하고 냉혹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인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은 전형적인 악인 같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은 거짓된 가면을 쓴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라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을 벗어 던진 살인범이 무고한 시민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는 점은 실제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눈곱만큼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숨 막히는 추격전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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