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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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바다야?"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거든."

입을 꾹 다물고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p.52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우리 삶은 어땠을까. 글쎄, 한 번도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낯설고 삭막할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음악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음악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문명에도 갖가지 형태의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자들이 찾아 냈으니, 음악이란 우리가 짐작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서 극중 해야는 선에게 묻는다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그에 대한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 난 터벅터벅 걸었을걸?"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었다. 극중 해야 역시 흥미가 번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 난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땐 조금 다르게 걷거든. 예를 들면 '타닷타닷' 이라든가 '퐁퐁퐁' 걷는 거지."

이 한 장면에 이 작품의 특별함이 모두 담겨 있다. 저자가 그 동안 음악을 계속 만들어오던 사람답게 소설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문장에서, 단어에서, 그리고 장면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걸 두려워해. 예를 들면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나, 제시간에 마감하지 못할 업무 따위를."

그녀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였다.

"이런 걸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내가 두려워하던 건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내 죽음도 여기서는 너무 작은걸."    p.81~82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소설 데뷔작이다. 얼마 전에 발매된 악동뮤지션 정규앨범 <항해>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으로 삶의 가치관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이 소설을 통해 은유적으로 녹여냈다고 한다.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이 소설 속 차례의 제목들과 공유되고 있어서, 소설과 노래가 하나로 흐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의 질감이 고스란히 표현된 표지의 이미지부터,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파란색 글씨까지 이 소설은 바다의 푸른빛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극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녹음 작업을 하던 선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금 이곳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업을 중단하고 1년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고 선의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술 그 자체보다 '모든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단발 머리의 한 여자를 구하게 되면서, 그토록 헤매던 삶의 답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게 된다.

 

귓가에 넘치는 바다, 눈을 감고 느낀다

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항해하는 법을 알아

 

가짜로 살기에는 허상에 가득 찬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짜로 살기엔 아직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던 나, 선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다고 말하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간다. 예술가의 감성과 깊이, 그리고 음악에 대한 고민이 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소설이라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션 이찬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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