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
올린카 비슈티차.드라젠 그루비시치 지음, 박다솜 옮김 / 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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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이켜보면, 이제부터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셰브를 만난 것도 그런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사랑의 좋은 것들을 전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천천히 광기에 잡아 먹히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서서히 그를 옭아매는 광증에는 곧 과대망상이 따라왔다. 그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만에 일어났다. 정신이 온전한 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길고 느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그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새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기억해줘."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p.43

이별을 하고 나서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린 다음에 가장 난감한 것이 떠나간 그 혹은 그녀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함께 찍은 사진, 서로에게 쓴 편지, 함께 읽은 영화와 책들... 집안 곳곳, 거리 곳곳에 떠나간 연인에 대한 기억들이 가득할 테고 그 흔적들을 정리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보통은 그 사랑의 덧없는 잔해들이 잔혹하고, 슬프고, 실패이기 때문에 흔적을 제거하고, 기억을 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버리지 말고, 기억과 함께 저장할 수 있는 보관소가 있다면 어떨까. 결과야 어찌 되었든 당시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들이었고, 행복한 추억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주 특별한 보관소 '이별의 박물관'이 탄생하게 된다.

2006, 크로아티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전시가 열렸다. 사랑의 크고 작은 순간들을 기념하는 것처럼이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4년간 사귄 연인이었던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사랑이 끝나고 남은 물건들의 처분을 고민하다 이별 보관소를 만들기로 한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별을 상징하는 물건과 그에 얽힌 사연을 보내왔고, 이별의 박물관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모든 헤어진 연인들의 망명처 역할을 하고 있다.

 

낡아 해지고 모래가 묻은 이 책들은 최근에 끝난 길었던 사랑의 상징이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프루스트의 책에 중독되었다. 특히 휴가를 가면 나는 그녀에게 그의 소설을 소리 내어 읽어주곤 했다.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알가르베의 타비라섬에서 보낸 몇 번의 여름 동안 읽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백사장으로 걸어 나가 부목과 대나무, 실크 사롱으로 은신처를 만들고선 대서양의 둔탁한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이 산문에 빠져들곤 했다.    - '읽지 못한 결말', p.141

다리가 몇개 남지 않은 지네 인형, 종이접기 꽃, 점토로 만든 여우, 낙하산 장치, 어린이용 자동차, 깨진 거울 조각들, 실리콘 가슴 보형물, 머리카락 타래, 바이올린 로진, 휴대용 체스판, 스틸레토 힐 한짝, 하트 모양 메달 장식, 콘크리트 조각 등등.. 이것들은 이별의 박물관에 사연과 함께 보관된 물건들이다. 이별의 박물관에 전시된 각각의 물건과 사연 들은 사랑이 지속되었던 기간,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와 함께 기록되어 그곳에서 지나간 시간을 영원히 박제 시킨다. 이들의 사연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한 너무 사소하다. 평범해서 지루하고, 파격적이어서 놀랍기도 하고,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내용 또한 가지각색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고, 또 헤어지며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가장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별담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지나간 사랑과 이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박물관 설립자 올린카 비슈티차와 드라젠 그루비시치가 직접 선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애틋한 203가지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흔하디 흔한, 특별할 것 없는 이별담이 당사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이 책은 그 수많은 이별담 중에서 나쁜 기억은 지워버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잠시라도 존재했던 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한 박물관이라는 별칭만큼 이곳의 존재 이유는 특별하다. 그 누구도 현재 진행형인 사랑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버린 이별에 대해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와 헤어지고 힘들어할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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