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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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회에 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돼요."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팅커는 진지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 내가 말했다.

"딱 하나면 돼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는 자기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심장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p.76

1966, 케이트와 밸 부부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다. 1930년대 말에 뉴욕 지하철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인물사진들을 전시하는 자리였다.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 말쑥한 사람, 칠칠치 못한 사람..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들은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포착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자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공황이 시작됐을 때 열여섯 살이었던 케이트는 당시의 시대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다 30년의 세월과 만남의 협곡을 건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얼굴을 발견한다. 팅커 그레이의 미소를 다시 보게 되면서, 케이트의 마음은 1937년의 뉴욕으로 돌아간다.

미국 중서부 출신의 놀랄 만한 미인인 이브는 케이트의 하숙집 룸메이트였다. 이브와 케이트는 신년 전야에 클럽에서 굉장한 미남에 값비싼 외투를 입고, 상냥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는 신사 팅커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팅커와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맨해튼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함께 영화를 보고, 재즈 음악을 즐기고, 술을 마시고, 토론을 하며 서로에게 이끌린다. 비서로 일하는 케이트는 점심시간에 우연히 팅커를 만나 커피를 한잔 하게 되고, 그 일은 이브의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 셋에겐 아직 사랑보다 우정이 더 중요한 시기였고, 그들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함께 차에 탔던 세 사람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팅커와 케이트는 무사했지만 이브는 얼굴을 심하게 다쳐 여러 번 재건수술을 받게 되는 처지가 된다. 운전을 했던 팅커는 자책감에 이브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퇴원하는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간다.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남자, 팅커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이제는 누가 누구의 것이고, 극장에서 누가 누구 옆에 앉을 것인지를 따질 수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인생은 여행보다는 허니문 브리지와 더 가깝다. 20대 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수많은 꿈을 좇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도 시간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 게임을 하면서 카드를 하나 뽑으면 그 카드를 그냥 갖고 다음 카드를 버릴 건지, 아니면 먼저 뽑은 카드를 버리고 그 다음 카드를 가질 건지 곧바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는 우리가 뽑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p.517

에이모 토울스의 눈부신 데뷔작 <우아한 연인>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2013년에 국내 출간되었을 당시에 읽고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던 작품이기도 하다. 새롭게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면서 <모스크바의 신사>와 같은 느낌의 디자인으로 새 옷을 입었는데,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이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는 동안, 절판되어 구할 수 없었던 그의 데뷔작을 만나 보자. 그리고 지금 책 구매 시 영어 원문이 포함된 젊은 조지 워싱턴의 <Rules of Civility> 미니북을 받을 수 있다. <우아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 팅커가 성공을 위해 조지 워싱턴의품위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던 인물이기 때문에, 미니북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의 원제인품위의 규칙(Rules of Civility)’ 또한 조지 워싱턴의 '사교와 토론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 및 품위 있는 행동 규칙'에서 가져온 것이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민자의 딸이자 노동 계층인 케이티와 할리우드 드림을 꿈꿨던 이브, 그리고 젊고 유망한 은행가 팅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와 팅거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진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등장하지만, 흔해빠진 삼각관계나 애정관계 없이 세 인물의 관계가 담백하게 진행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중심 서사만 따지자면 언뜻 전형적인 구성으로 보이지만, 사실 줄거리 요약만으로는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극 중 팅커는 오래 전 케이트가 무인도에 난파할 때 소로의 월든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케이트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를 만나 월든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을 발견한다. 나 역시 6년 전에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월든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케이트가 엄청난 책벌레였기 때문에 이 작품은 곳곳에서 고전 문학들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브에게 헤밍웨이를 읽어 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힘든 시기를 겪으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들을 통해 위로 받기도 하는 등, 중요한 장면마다 배경에는 항상 고전 문학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극 초반,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주친 케이트와 팅거가 나누었던 대화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면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팅거는 케이트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걸 말해봐요." 그리고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이 폭풍 같은 격랑에 휩쓸리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 이번에는 케이트가 팅거에게 묻는다. "당신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사실 하나만 얘기해줘요." ,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이 작품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다. 아직까지 이 장면의 페이지까지 이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가슴이 시리도록 매우 사랑한다. 완벽하게 재현된 193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섬세하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이들의 이야기를 꼭 만나 보길. 당신도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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