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곤베리 소녀
수산네 얀손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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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지금까지 믿었던 현실이 쩍 갈라지면서 자신이 그 틈으로 떨어져 말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조차 사라진 장소로 굴러 들어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곳으로 말이다. 구조물이 폭발해 산산조각이 되고 나서야 현재의 순간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도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 같았다. 그녀가 그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다음 순간 극렬한 반사작용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내가 무슨 경험을 하고 있는 거지?'    p.53

생물학자인 나탈리에는 온실효과가 습지의 부패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14년 전 이곳 모스마르켄을 말없이 떠났었다. 이곳은 달슬란드와 베름란드 사이 습지에 자리 잡은 황량한 곳이었다. 늪지로 유명한 외딴 마을이었고, 오래 전 기원전 300년에 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소녀가 시체로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재는 '링곤베리 소녀'라 이름 붙여진 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늪지는 산소가 부족하고 산성인 환경 덕분에 부패가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곳이다. 덕분에 당시 발견된 소녀는 거의 부패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과 의복, 금장신구가 남아 있는 미라 상태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시신을 품고 있었던 장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으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도 평화로운 곳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에 키 작은 소나무들이 누러 바다에서 튀어나온 앙상한 팔처럼 서 있고, 거대한 하얀 하늘 아래로 누르께한 풀과 이끼의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이니 말이다.

한편, 저명한 사진작가인 마야는 어머니가 경찰이었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예술과 경찰의 세계를 하나처럼 느껴왔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평범하지 않은 부업인 법의학 사진가 일을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레이프 형사와 함께 늪지 근처에서 청년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사건을 조사 중이다. 그녀는 현장을 촬영하면서 늪지의 풍경과 그곳에 가라앉은 것들에 관심이 생기게 되고, 오래 전 발견된 '링곤베리 소녀'와 현재 벌어진 사건 사이에 기묘한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늪지에서는 지난 14년 동안 실종되었던 사람들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되기 시작한다.

"아니, 나탈리에. 그런 건 없어." 그가 대답했다.

"아저씨가 유령이 정말 있다고 말하신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다시 침묵.

"유령은 존재하지 않아, 나탈리에. 그게 바로 유령이야." 그가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 말이야. 그러니 유령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모순이야."    p.147

모스마르켄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항상 돌곤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그곳에서 제물을 바쳤다는 말이 있었고, 실제로 링곤베리 소녀를 비롯해 미라로 발견된 존재도 있었으니 그냥 전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늪지에서 지난 14년 동안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과연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것은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범죄일까, 늪지라는 괴물이 사람들을 데려간 것일까. 이야기는 나탈리에가 14년 전에 겪었던 비극에 대한 미스터리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마야의 시선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늪지는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띄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제의나 영적 세계와 소통하는 장소로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늪지는 떠돌이들을 매장할 완벽한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회와 대중의 의식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불모지이자 쓸모 없는 땅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찾을 이유가 없는 장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이러한 늪지의 풍경들을 완벽하게 묘사해서 실제로 안개 자욱한 늪지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검은숲 독서클럽 1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수산네 얀손의 데뷔작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스웨덴 작가이기도 하고, 북유럽 스릴러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기도 해서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주로 마약과 살인 등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그려온 여타의 북유럽 스릴러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늪지 서스펜스라는 장르적 재미, 그리고 피 한 방울 없는 죽음을 묘사해 오싹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묻어 나오는 공포까지 버무려져 색다른 북유럽 스릴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웨덴의 습지 풍경들을 검색해봤는데, 정말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더욱 오싹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산소가 결핍된 늪 속에서 자연 방부처리 되어 마치 잠에 빠진 듯한 늪지 시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육지와 바다 사이의 경계, 마른 곳과 젖은 곳의 경계,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 사이의 경계,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이기도 한 매혹적인 그곳으로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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