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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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서야 깨달았어. 나한테는 중요한 뭔가가 없다는 걸. 그 이유를 찾다가 어릴 적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어."

"너한테 뭐가 없다는 건데?"

"없어." 사야카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알아. 나밖에 몰라. 난 결함 있는 인간이야."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 사야카의 입에서 튀어나와서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p.37

7년 전 헤어진 그녀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약 육 년 동안 연인이었다. 하지만 딱히 정열적인 애정 표현을 나눈 적도 없고 극적인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육 년이나 사귀고 있었고,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건 사야카였다. 그랬던 그녀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이 지도에 있는 곳에 가줘. 나랑 같이."

 

남편은 미국 출장 중이고,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연락했다는 사야카는 사 년 전에 결혼해서 현재는 전업주부였다. 그녀는 황동으로 만든 열쇠와 편지지에 검은 잉크로 그린 지도를 보여 준다. 일 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이 지도에 있는 곳에 함께 가달라고 부탁한다. 아빠의 생전 행동 중에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고, 어쩌면 아버지가 이 지도에 있는 곳에 주기적으로 다녀오셨던 것 같다고,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거였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어릴 적 기억이 전혀 없다고,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이곳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나가노의 숲 속에 위치한 회색 집을 찾게 되는데,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기묘한 그 집에서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과 자신의 과거를 찾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이 집에 감도는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비과학적인 표현이었지만 저주와도 같은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건, 사야카의 기억이 사라진 것에도 그 저주가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사야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건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생각에 빠져들던 나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p.192

크레타 문명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크노소스 궁전 안에 고고학자들을 괴롭힌 방이 있었다고 한다. 배수시설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사용할 수는 없었고, 방을 만든 재료도 마모되기 쉬운 재질이었으며, 계단 등에 사람이 지나다니며 생기는 사용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 방은 무엇일까 모두 의아해했다. 그곳은 바로 망자가 저승에 가서 생활하는 방, 유령을 위한 공간, 요컨대 무덤이었던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작품을 착안했다고 한다. 덧창이 닫힌 어둑한 집 안, 수북이 쌓인 먼지와 스산한 공기, 오래된 일기장, 같은 시간에 멈춰버린 시계들...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만큼 공포를 불러 일으키기 적절한 장치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으로 단 두 명의 등장인물이 한적한 숲 속의 회색 집에서 만 하루 동안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연극적인 구성이 돋보이는 본격 미스터리로 손꼽히는데, 시종일관 오싹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게 만들어 공포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작가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야심작'이라는 표현을 할 만큼 자신감과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별다른 사건이나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아도 시종일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긴장감과 서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도 10년이 넘어 새 번역과 새 디자인으로 다시 출간된 작품이고, 요즘 같은 날씨에 읽기 딱 좋은 이야기이니 이번 기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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