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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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흰 이를 내보였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도리어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것을 깨달은 듯 가가는 그답지도 않은 실없는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뭔가 각오한 듯이 숨을 토해낸 뒤, "과연 우리가 다른 친구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 아닌가?"    p.236~237

이번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국내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개정판에서는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이 작품을 오랜 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최근에 가가형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던 터라,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 만나는 가가 교이치로의 풋풋한 모습이 너무도 반가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 <방과 후>로 데뷔했고, 두 번째 작품으로 1986 <졸업>을 출간했다. 이 작품에서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아직은 형사가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으로 나와 더욱 흥미진진했다. 가가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버지가 경찰이기 때문이라고, 경찰이란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자신은 교사 아니면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했으면서도, 결국 교사가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친구인 사토코에게 프로포즈를 했기 때문에, 가족을 꾸리려면 경찰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참고로 가가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사연에 대한 진실은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 밝혀 진다. 그리고 가가는 시리즈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네 번째 작품인 <악의>에서 재직 중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교사로서는 실격이라고 판단해, 경찰에 입문하게 된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가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나미사와 선생님의 말씀대로 진실이란 볼품없는 것이고 그리 큰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치 있는 거짓말이라는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가가는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친구의 원한을 풀자는 게 아니었다. 아무 이론 없이, 오로지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과도 달랐다. 더구나 정의감 같은 건 가장 적합하지 않은 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것이 우리의 졸업 의식이라고 가가는 생각했다. 긴 시간을 들여 언젠가는 무너져버릴 나무토막을 쌓아온 것이라면 그것을 무너뜨렸을 때 비로소 우리가 건너온 한 시대를 완성시킬 수 있으리라.   p.374

, 다시 <졸업>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해온 7명의 친구들은 대학 졸업을 몇 달 남겨두고 있다. 가가의 첫사랑은 침착한 성격의 사토코이고, 그녀는 졸업 후 도쿄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현재 집에서 도쿄까지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집을 떠나야 하는데, 그녀가 도쿄에 올라가 혼자 산다는 것에 아버지가 반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미카와 쇼코 백로장이라는 대학생 원룸 맨션에 살고 있다. 얌전하고 수동적인 쇼코는 모 여행사에 취직이 결정되었고, 나미카는 가가 만큼 검도 실력이 뛰어나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기도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다. 쇼코는 현실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도도와 커플이고, 와코와 하나에는 테니스부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는 커플이다. 다도회, 검도부, 테니스부라는 각자의 취미 활동으로 함께 우정을 나눠 온 일곱 친구들은 바쁜 취업 준비 과정에서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쇼코가 자신의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현장은 자살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연인인 도도조차 자살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남은 친구들이 은사인 미나미사와 선생님 댁에서 다도 모임을 갖다가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지게 되는데... 두 사건 뒤에 감춰진 동기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가는 자신만의 추리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가가 형사 시리즈가 여타의 추리소설 시리즈물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이야기의 중심에 주인공이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리즈물일 경우, 그 인물의 개인사부터 시작해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메인 플롯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시리즈 캐릭터를 필요 최저한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외 다수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의 첫 작품인 <졸업>에서는 가가 교이치로라는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또 그의 성격을 가장 많이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에서 가가는 대학생 신분으로 활약을 펼치는데, 웬만한 형사 못지 않은 직감과 뛰어난 추리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 사토코에 대한 고백과 그녀를 대하는 태도, 친구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모습과 아버지의 대한 그의 생각 등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어 시리즈의 원형이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냉철한 머리, 뜨거운 심장, 빈틈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범인을 쫓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않는 불세출의 형사 가가 교이치로, 그의 탄생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라 열 권의 리즈 중에서도 이 작품만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갓 데뷔한 20대에 발표했던 풋풋한 청춘 미스터리이지만, 결코 가볍거나 만만한 작품이 아니다. 가가형사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을 읽고 나서, 첫 번째 작품을 다시 만나서인지 읽는 내내 향수와 설레임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가가형사 시리즈 중에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조건 이 작품부터 만나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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