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지리 다리를 지나자 푸른 물이 출렁거리는 계곡이 이어져, 주위에 고층 건물이 없었다면 여기가 도쿄라는 사실을 잊을 것 같았다.

"도쿄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기는 처음이에요."

"한 방향에서만 바라보면 본질을 알 수 없는 법이야. 사람이나 땅이나."

가가의 말에 마쓰미야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p.190~191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그 열 번째 이야기이자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것이 1986년에 발표된 <졸업>이었으니, 시리즈 열 편이 진행되는 동안 무려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특히나 히가시노 게이고가 시리즈물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캐릭터이고, 데뷔작인 <방과후>를 쓴 바로 다음 작품이 이 시리즈였기에 그의 작가 인생 전체와 함께 하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수사 실력이나 뛰어난 직감 등을 가지고 있는 형사 캐릭터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따뜻한 캐릭터라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전반부의 작품보다 후반부의 작품에서 가가 형사의 비중이 많이 높아졌었다. 시리즈 여덟 번째인 <신참자>에서부터 옛 도쿄의 정취가 어린 니혼바시 일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기린의 날개>를 거쳐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배경이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 이르러서야 가가 교이치로가 파견 근무를 자청하면서까지 니혼바시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오고, 그 동안 간단히 언급되어 온 그의 복잡한 가정사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시리즈 최대의 미스터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가가가 자리에 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아는 간호사 분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그랬답니다, 저세상에서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육체 따위는 없어져도 좋다고요.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켜도 좋은가 봅니다. 히로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히로미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지만 겨우 참아 냈다.    p.352

도쿄 변두리의 한 아파트에서 타살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목이 졸려 죽은 변사채는 시가 현의 청소 업체에서 일하던 오시타니 미치코로 밝혀진다. 이상한 것은 시신이 발견된 아파트의 집 주인과 전혀 접점이 없었다는 것이고, 집의 주인인 고시카와 무쓰오 역시 행방이 묘연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아파트 근처 하천 둔치에서 노숙자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비닐로 지어진 오두막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 안에서 불에 탄 남자의 시신이 나온 것이다. 경찰은 두 사건의 시기와 현장의 거리 등 유사성에 주목하지만, 좀처럼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다. 한편 오시타니 미치코가 도쿄에 올라왔던 이유가 중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경찰은 자연스럽게 연극 연출가인 아사이 히로미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지만 수사는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돈다. 과연 남의 아파트에서 죽은 여자의와 남의 오두막에서 불에 탄 남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가가는 사건 현장에 있던 달력에서 자신의 어머니 유품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던 가가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점점 더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아 간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어머니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건의 중심에 있는 아사히 히로미의 비극적인 가정사와 가가 형사의 과거사가 얽히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복잡하게 펼쳐진다. 어린 시절의 비극을 딛고 연극 무대를 향한 오랜 꿈을 실현한 여성 연출가와 어릴 적 가출한 어머니의 행적을 찾아 니혼바시 일대를 맴도는 경시청 소속 형사,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거대한 비극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명불허전,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에 걸맞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가가 형사 시리즈’ 그 마지막 이야기라서 너무 아쉽지만, 그만큼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막을 내리는 것이라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