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그냥 죽이고
싶다.
속이 후련해질지도 모르니까. 그게 다다. 특별히 재미있어 보인다거나 즐거워 보여서 이러는
건 아니다. 엽기 살인 사이트
등을 보는 사이에 감화되어 흥미가 생긴 것도 아니다.
여하튼 세상에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우둔한 쓰레기들뿐이다. 하나같이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그저 멍하니, 의미 없이 살고 있다. p.9~10
발견된 시신 주변으로 두부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져 있다. 아무리 봐도 시체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부라니.
두부처럼 부드러운 걸로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더라도 살인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엉뚱하고도 파격적인
제목과 표지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 잡는 작품이다.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로 알려진 구라치 준의 단편들을 모은 미스터리 작품집으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 바카미스적 트릭, 패러디, SF적
상상력 등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어 흥미롭다.
<ABC
살인>은 제목 그대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 A, B, C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차례로 살인당한다는 모티브를 가져와 구라치 준은 동생을 죽이고 싶어하는 주인공이 묻지마 살인 사건을 알파벳 연쇄
살인으로 조작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사내 편애>라는 작품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종의 SF작품인데, 짧지만 임팩트있는 이야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불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는 발상에서 시작해 개발된 시스템이 한 회사의 인사 관리를 하는 마더컴퓨터로 활용이 되고
있다. 회사 안의 컴퓨터는
전부 마더컴과 연결되어 있었고, 모든 사원들이 이 시스템의 지도하에 놓여 승진,
연봉 인상,
인사이동 등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마더컴이 특정 한 인물을 편애하기 시작하고, 그 사실을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발상도 신선했고, 진행되는 스토리도 유쾌했던 작품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대체 뭔가?”
나도 처음부터 그것이 걸렸다. 시체의 머리 부분을 중심으로 하얀 것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두부다. 앞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주변에 흩어진 두부. 게다가 시체의 후두부에는 사각 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1944년 12월
초순. 제국육군특수과학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p.157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유독 기묘하고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작품들이었다. 표제작인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도 그렇고, 입에 하얀 대파가 꽂히고 시신 주변으로 케이크가 놓여 있는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등 기발한 살인
현장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설정의 참신함에 비해 트릭이나 반전은 다소 약해서 아쉽긴 했다. 특히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상한 연구를 하는 미치광이
과학자에게 욕을 먹었던 병사가 살해당하면서 시작하는데,
결말이 좀 어처구니 없다고 할까. 여기서 진행되는 실험 자체도 좀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엉뚱했는데, 살인 사건의 결말
역시 다소 의아하다 싶을 만큼 이상하고 싱거웠다.
마지막으로 분량이 가장 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은 구라치 준의 기존 작품에서도 만나왔던
네코마루 선배가 등장하는 밀실 추리물이다. 정해진 직업 없이 여기저기 불쑥 나타나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한량 캐릭터, 네코마루 선배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매우 반가울 것
같다. 무심한 듯
다정한, 엉뚱하지만 매력있는
캐릭터라 이번 단편에서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작품도 있었고, 다소 아쉬운 작품도 있었지만, 작품 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 구라치 준의 다양한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집이 아닌가 싶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넘나들며
‘미스터리계의 교과서’로 불리지만,
‘좀처럼 일을 안 하기로 정평이 난 작가’라는 농담이 떠돌 정도로 과작인 작가이기도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