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나가카와 나루키 지음, 문승준 옮김, 신카이 마코토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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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흰 눈이 내려 쌓인 거리와 새카만 거인 같은 철탑이 보인다. 눈은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다. 하지만 그녀를 태운 전철 소리만은 쫑긋 솟은 내 귀에 들린다. 세상을 움직이는 심장 소리.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그 고동을 나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녀의 문제를 어떻게 해줄 수 없다. 그저 옆에 있으면서 나의 시간을 살아갈 뿐이다.    p.52~53

안개 같은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 고개를 들 기력도 없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골판지 박스 바닥에 뺨을 바싹 붙인 채 눈을 감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온다. 커다란 비닐우산을 들고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는 긴 머리카락의 여성은 잠시 고민하다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와 고양이가 함께 나누는 일상이 이어진다. 아기 고양이는 초비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그녀의 고양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야기는 고양이의 시점과 사람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아기 고양이 초비가 뚱뚱한 아저씨 고양이가 되어 가는 동안, 초비의 여자친구 미미와 미미의 보호자 레이나, 그리고 지혜로운 노견 존과 보스 고양이 구로, 미미의 새끼인 쿠키와 쿠키의 보호자 아오이 등 각 장별로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양이들간의 관계는 각자의 주인과의 관계로 교집합되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하는 일상들은 소소하지만 뭉클하고 따뜻하다. 계절이 바뀌고, 고양이들이 자라고, 죽고.. 인간들의 삶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담담하고 정갈한 단어들 속에서 계절의 냄새가 느껴지고, 풍경이 그려지고, 고양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감정들이 따스하다. 언어 속에 색채가 숨겨져 있어서 활자들로 가득 찬 페이지를 읽는데도 눈 앞으로 풍경이 그려지는 느낌도 들었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내 옆을 걷던 사람이 그렇게 말해준 적이 있다. 그 한마디로 나는 상당히 편해졌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건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모두에게 보이는 걸 보지 못하는 탓에 주위에 상처를 준다고. 내 진짜 마음 역시 알 수 없었다. 알았는데 모르는 척한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   p.196~197

이십여 년 전, 게임 회사 직원이던 신카이 마코토는 매일판타지속 이야기를 다루는 생활을 이어가던 와중에 자신이 사는현실에 밀착된 이야기를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꿈을 품는다. 그렇게 퇴근 후 새벽까지 매킨토시 한 대로 혼자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 첫 작품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완성했다. 그러니 이 작품은신카이 월드의 출발점이자 그 모든 특색의 원형이기도 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은 <너의 이름은>이라는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지만, 사실 그 전에도 <초속 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 <언어의 정원> 등의 작품을 통해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시대를 선도하는 감독이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는 그가 매킨토시 한 대로 1인 제작한 모노톤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소설로 만나는 이 작품은 원작의 오 분여 시간에 응축된 스토리가 얼마나 다채롭게 확대되었는지 살펴보는 재미와 함께 원작 속 대사가 어떻게 스토리에 녹아들어 있는지 눈여겨보는 재미도 안겨줄 것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는 그런 관계는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초비는 생각한다. '이 세상이 좋다'라고. 그 순간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 초비는 그녀의 눈부신 미소를 올려다보며 생각한다. '그녀도 아마 이 세상이 좋은 모양이라고.' 어쩐지 비가 내리는 날, 감상적인 마음이 되었을 때 읽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예쁜 작품이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을 타고 꽃잎이 들어오는 그런 날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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