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민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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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를 떠난 나의 일상은 모조리 급수가 다른 시합과 마찬가지다. 청소도, 주방일도, 세탁도, 통근도, 사랑도, 일도, 술자리의 예의범절도, 심지어 편집자와의 미팅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급수가 다른 시합에서 누군가는 승리에 의의를 두겠지만, 나는 사양하겠다. 책상을 떠나 있을 때, 나의 신체는 바짝 긴장하여 뻣뻣해지고,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데다 사무 처리 능력도 먼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거다. 그로 말미암아 실수한 일들을 일일이 사과하려면 끝이 없다.    p.113

모리미 도미히코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가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들은 보는 내내 킥킥대며 웃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기 전에 뭉클하고 짠한 뭔가가 가슴에 남은 것 같은 기분도 들게 하고, 말도 안 되는 온갖 판타지가 난무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상상력이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넘어서 망상력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써왔던 모리미 도미히코가 쓴 첫 에세이집이다.

프롤로그부터 범상치가 않다. 그는 '자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고 고백한다. '철학서처럼 어렵지 않고, 소설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책도 아니며, 그렇다고 재미가 없어 하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무익하지도 않은 그런 책 말이다. 그리하여 중간부터 읽어도 되며, 읽고 싶은 부분만 읽어도 되는 책, 긴 것, 짧은 것, 농후한 것, 얄팍한 것, 능청스러운 것, 나름대로 성실함을 갖춘 것 등의 다양한 글이 모여 이 책이 만들어졌다. 책을 읽는 독자들을 평안한 꿈의 나라로 유혹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하니, 읽다 졸리면 죄책감이나 미안함 없이 그냥 책을 덮고 자도 되는 책인 셈이다.

내 경우에는 소설을 막힘없이 술술 써본 적은 거의 없다. 사전에 구상했을 때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는데 쓸수록 만신창이가 되어간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자신이 쓰고 있는 모든 것이 재미가 없어서 견딜 수 없다. '왜 이런 것을 써야 하지?' 진절머리가 나서 벽에 쿵쿵 머리를 박는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은 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즉 내가 쓰는 작품은 내 잘못이 있다는 걸 가르쳐주긴 하는데,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며 계속 고쳐 쓰는 수밖에 없다.   p.367

이 책에는 모리미 도미히코가 쓴 독서에 관한 단상과 작품 해설, 좋아하는 아이템에 관한 글도 수록되어 있고, 자신의 소설과 집필 상황에 대해 쓴 글들도 있다. 산책과 여행에 관한 글도 있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대만의 문예지에 연재했던 칼럼,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일기도 있다. 누구나 에세이의 소재로 쓸 수 있는 평범한 풍경과 일상적인 물건도 모리미 도미히코의 시선에 의해 굴절되어 단어로 만들어지면 절대 평범해질 수가 없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의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아기자기하고 유머스러운 코드를 잃지 않아 유쾌했고, 만화처럼 현실감 없는 캐릭터마저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만들었듯이 그의 독특한 성격과 귀여운 투덜거림마저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교토의 천재 소설가'의 머릿속을 잠깐 동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이고, 끝을 모르고 펼쳐지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의 소유자이니 말이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망상이 어떻게 작품의 시초가 되고, 그것이 소설로 발전하게 되는지 그 과정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일상 또한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소설가라는 신비로운 대상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한 이들에게도, 또 글을 쓰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마법처럼 읽힐 것 같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만큼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게 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 졸리면 그냥 덮어두고 자도 된다는 작가의 겸허한 권유가 허용되는 특별한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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