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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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이런 일들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자주 다른 가정에서도 벌어지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 모든 글은 가장 극적인 것을 포함한 어떤 행위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나 보다. 하지만 애인에게 털어놓은 것을 제외하면, 이 장면은 여전히 언어도 영상도 없는 듯한 이미지로 가슴속에 간직되었기 때문에, 이를 묘사하려고 사용한 단어들이 낯설고 무례하기까지 느껴진다. 이것은 남들을 위한 하나의 장면이 되었다.   p.26~27

'6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강렬한 문구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서사를 담고 있다. 그녀가 열두 살 이던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셨고, 이내 어머니의 비명과 울음소리와 함께 목격한 것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낫을 들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 장면에서 그녀가 느낀 것은 두려움과 슬픔이 아닌 '부끄러움' 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사건은 그저 '나쁜 꿈'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고, 비극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비극의 장면을 도처에서 본다.

 

부모가 아이를 앞에 두고 다투는 것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목을 조르고 때리는 장면을 바라보는 열두 살 소녀의 모습은 어쩐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평상시에 폭력을 휘두르던 가장도 아니었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그녀의 부모들 역시 그날 일을 전부 잊기로 결정한 듯 행동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에르노는 열두 살의 어느 일요일 정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마치 일기처럼 글로 써낸다. 그럼에도 감정적이지 않고 매우 건조하게, 마치 남의 일기를 두고 분석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냉혹하고 담백하게 쓰고 있다. 내 부모가 부끄럽고, 내 가난이 부끄럽고, 아무리 노력해도 품위 있고 우아한 생활이란 내 가족들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건조한 문장들 속에서 아프게 읽힌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p.137

누구에게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혹은 규정해버린 어느 순간, 어떤 기억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차마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어떤 것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에르노는 그러한 부끄러움을 글로 옮기면서 말한다. ', 모든 글은 가장 극적인 것을 포함한 어떤 행위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나 보다' 라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그것을 글로 쏟아 내면서 불가능하고, 끔찍했던 장면도 생각보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에르노는 기억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글이라는 수단과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찾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다. 부끄러움이란 달리 말하면 불편함일 것이다.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야 하는 데서 오는 수치스러움과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서 오는 고독과 슬픔 또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은 부끄러움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다. 교육받지 못한 부모, 가난한 집, 부끄러움은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날 이후 부끄러움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고 말이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회상을 통해서 에르노는 자전적 글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 작품을 발표했다. “타인의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책. 나는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가장아니 에르노다운 글쓰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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